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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리스크 털고 '절치부심' 6세대 D램 공정 선제 적용, 수율 50%까지 이달 말 샘플 공급에 역량 집중, '맞춤형' 승부수

반도체업계가 6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인 HBM4를 두고 치열한 물밑 경쟁을 벌이고 있다. HBM 시장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SK하이닉스는 일찌감치 HBM4 샘플을 주요 고객사에 제공한 사실을 공개하며 선두자리 수성 의욕을 내비쳤고, 추격자 입장인 삼성전자는 이달 내 샘플 공급에 나설 채비를 갖추며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 최대 고객사인 엔비디아가 내년 선보일 차세대 그래픽처리장치(GPU) ‘루빈(Rubin)’에 HBM4를 탑재키로 하면서 양사의 사활을 건 경쟁은 내년을 기점으로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HBM4 전쟁 속 삼성 반격 선언
22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3분기 내 HBM4의 샘플을 주요 고객사에 제공할 것으로 예상된다. 엔비디아 루빈 등 인공지능(AI) 제품에 HBM4를 공급하기 위한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HBM4부터 1c(6세대) D램 공정을 활용하는데, 최근 1c 공정의 수율(완성품 비율)은 50% 수준까지 개선된 것으로 추정된다. 올해 초만 해도 삼성전자 1c 공정 수율은 10% 수준이었다.
SK하이닉스는 이미 엔비디아 등에 HBM4 샘플을 공급한 만큼 올해 내 양산 준비를 무난히 마칠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샘플 공급으로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와 함께 HBM4를 탑재한 루빈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게끔 최적화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SK하이닉스는 2022년 HBM3를 시작으로 지난해 HBM3E 8단, 12단을 업계 최초 양산에 성공하며 선두를 유지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준비 중인 12단 HBM4 샘플은 곧 나올 엔비디아의 루빈 GPU와 AMD의 MI400 AI 가속기에 들어갈 예정이다. 반도체업계에서는 HBM4가 AI 가속기 기종마다 요구하는 사양에 맞게 맞춤 제작이 몰려 경쟁이 더 복잡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최근 “HBM4를 시작으로 고객 요구에 맞춘 제품 경쟁이 본격화할 수밖에 없다”고 밝힌 바 있다.
SK하이닉스 '가격 프리미엄' 사라질까
관건은 삼성전자가 엔비디아에 HBM4를 제때 공급할 수 있을지다. 골드만삭스는 삼성전자가 본격적으로 HBM 시장에 진입하면 HBM 가격이 하락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5세대 HBM3E 가격이 올해 대비 내년에 약 30% 하락하고, HBM4 가격 프리미엄은 이전 세대와 비교해 45% 수준일 것으로 전망했다. 삼성전자 진입이 늦어지더라도 HBM3E의 평균 판매가격은 10% 하락하고, HBM4의 가격 프리미엄은 55%에 그칠 것으로 예상했다.
국내 증권사들도 잇달아 내년 HBM 가격 전망치를 하향 조정하고 있다. LS증권은 2026년 HBM 가격이 올해보다 5% 떨어질 것이라고 예상했으며, 최근 대신증권은 올해 대비 6% 하락으로 전망을 변경했다. 류영호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삼성전자의 HBM이 엔비디아 진입에 성공한다면 HBM 시장은 공급과잉 우려가 확대될 것”이라며 “맞춤형 AI 반도체(ASIC)의 성장이 일부 HBM 수요 증가를 야기할 것으로 예상되나, 올해와 같은 공급 부족 상황이 유지되기는 힘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 삼성전자의 HBM4 시장 진입은 곧 SK하이닉스가 HBM3E에서 받던 가격 프리미엄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HBM 가격 협상 결정권이 공급자인 SK하이닉스에서 수요자인 엔비디아로 넘어갈 수 있어서다. SK하이닉스는 그동안 HBM3E 12단 제품을 사실상 엔비디아에 독점 공급하면서 높은 마진을 확보할 수 있었다. 12단 제품의 가격은 8단 대비 50~60%나 비싼 것으로 추정된다.
SK하이닉스가 2024년 3분기부터 매분기마다 40%대 영업이익률을 올릴 수 있었던 것도 HBM 가격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성전자와 미국 마이크론까지 HBM 생산 확대에 나선다면 40%대 영업이익률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시장의 관측이다.

마이크론도 속도, SOCAMM 공급사로 우위
다만 일각에선 HBM 시장 경쟁이 치열해진다고 해도 SK하이닉스의 HBM 경쟁 우위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공급 과잉 상태로까진 가지 않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수율 확보 등 HBM 생산에서 SK하이닉스가 확보하고 있는 노하우가 HBM4에서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SK하이닉스는 HBM4에서도 HBM3E와 같은 1b(5세대) D램 공정과 매스리플로우-몰디드언더필(MR-MUF) 방식의 후공정(패키징)을 그대로 적용하며 초기 수율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
엔비디아 입장에서도 오랜 기간 협력 관계를 이어온 SK하이닉스에 더 많은 HBM 물량을 배정하는 것이 공급망 위험을 최소화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는 해석도 있다. 또 HBM4 샘플 공급과 품질 인증 프로세서에서도 SK하이닉스가 경쟁사 대비 훨씬 앞서 있어, 초기 HBM4 물량을 상당 부분 선점할 수 있을 것이란 예측도 제기된다.
업계 일각에선 삼성전자가 이번 HBM4 납품에도 실패할 경우 이미 샘플 공급을 마친 마이크론에 밀려 시장 진입이 어려울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마이크론은 지난달 10일(현지시간) HBM4 샘플을 다수의 핵심 고객사에 전달했다고 자사 홈페이지를 통해 밝혔다. 앞서 SK하이닉스가 당초 HBM4 개발 로드맵보다 6개월 앞서 샘플을 완성하면서 마이크론도 개발에 속도를 냈고 SK하이닉스와 3개월 차이를 두고 이를 완료하면서 업계와 시장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이 쏟아졌다.
게다가 마이크론이 얼마 후에 엔비디아의 차세대 SOCAMM(System-On-Chip Attached Memory Module) 공급업체로 먼저 이름을 올리면서 HBM4에서도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될 것이란 전망이 이어졌다. SOCAMM은 HBM4와 동시에 엔비디아 루빈에 탑재될 가능성이 높은 메모리 패키지 모듈로, HBM을 CPU(중앙처리장치), GPU와 함께 패키징한 형태다. 이렇다 보니 뒤늦게 엔비디아 입성을 노리는 삼성전자의 행보에 업계와 시장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메모리 시장에서 HBM이 압도적인 실적 효자로 검증도 되면서 하반기 엔비디아 수주전을 시작으로 ASIC 수주전까지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