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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국 AI칩 매출 15% 미 정부 귀속
고성능 메모리 등 기술 교류 여지 확대
제한적 시장 개방, 중국 성장세 가속할까

미국 정부가 엔비디아, AMD 등 인공지능(AI) 칩 제조사에 대해 대중국 AI 칩 판매 수익의 15%를 징수하는 조건으로 중국 시장 접근을 허용했다. 이번 합의에는 중국의 고성능 메모리·AI 칩 수출 통제 완화 요구가 일부 반영되며 양국 간 조건부 협력 구도가 형성됐다. 업계에서는 이번 조치로 일부 하드웨어 접근성이 양호해진 중국이 기술 모방 속도를 높일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실리·안보 병행, 새로운 정책 접근
10일(이하 현지시각)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엔비디아와 AMD는 최근 반도체 수출 허가를 얻기 위해 중국에서 칩 판매로 얻은 수익의 15%를 미국 정부에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수익 분배는 엔비디아의 H20 칩과 AMD의 MI308 칩에 적용되며, 미 행정부는 아직 해당 수익에 대한 사용처를 결정하지 않은 상태다.
애초 미 정부는 AI 칩에 대한 대중 판매를 전면 금지하겠다고 밝혔으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의 회동을 계기로 대중 제재를 완화하면서 일정 수준의 세금을 부과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FT는 이를 “전례 없는 합의” 평가하면서도 “이번 합의는 미국의 일자리와 수익 창출 차원에서 관세를 빌미로 대미 투자 등을 글로벌 기업들에 유도하는 트럼프 정부의 (협상) 패턴과 일치한다”고 해석했다.
업계에서도 이번 합의를 예의주시하는 모양새다. 그간 국가 안보를 이유로 주요 기술 수출을 제한해 온 미국은 경제적 이익을 병행 추구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는 기술 봉쇄 일변도에서 벗어나 실리와 안보를 병행하는 새로운 정책 접근으로 볼 수 있다. 엔비디아와 AMD 또한 일정 수익을 포기하더라도 거대 시장 진입과 장기적인 점유율 확보라는 이익이 더 크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분석이다.
중국 역시 시장 개방의 대가로 정부의 보조금이 자국 기업과 미국 칩 제조사를 거쳐 종국엔 미 정부로 흘러 들어가는 흐름 속에 놓이게 됐지만, 반도체 확보가 산업 성장의 핵심 동력인 만큼 이를 감수하겠다는 입장이다. 결국 이번 결정은 기술과 정치, 경제, 기업 등 다수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복합적 합의인 셈이다.

무역 협상 테이블에도 HBM 수출 카드
나아가 이번 조치는 미국이 유지해 온 첨단 반도체 대중국 수출 규제 기조에서 일정 부분 물러선 사례로 평가된다. 미국은 조 바이든 대통령 재임 시절이었던 지난해부터 중국 반도체 기업 화웨이와 SMIC의 AI 칩 개발을 막기 위해 중국에 대한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출을 금지했다. 이러한 기조는 트럼프 2기 행정부까지 이어졌으나, 지난달 말 엔비디아 H20 수출이 재개되며 해빙 무드로 돌아섰다. H20은 일부 성능을 저하시켜 중국 수출용으로 별도 제작한 칩이다.
그러나 중국은 이 같은 변화에도 안심하지 않는 모습이다. HBM이 AI 자체 칩 개발에 필수 부품인 탓이다. FT는 8일 보도에서 “허리펑 중국 부총리가 이끄는 중국 무역 협상팀이 미국에 HMB 수출통제를 완화해 달라고 요구했다”면서 “워싱턴 정가에서도 10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이 예상되는 만큼 트럼프 대통령이 협상 진전을 위해 HBM 칩 수출규제 완화를 검토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우세하다”고 전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중국에 대한 AI 칩 규제와 감시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 또한 제기된다. 중국이 AI 칩을 밀수하고, 규제 대상에서 제외된 엔비디아의 게임용 칩을 AI 데이터센터 구축용으로 전용하는 등 수출 통제를 우회하고 있단 지적이다. 미 하원 미중전략경쟁특위 위원장을 맡은 존 물레나(공화·미시간) 의원은 “중국은 수출통제 대상이 아닌 게임용 칩을 첨단 AI 모델 훈련에 사용 중”이라고 짚으며 “상무부와 엔비디아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드웨어 직접 경험으로 학습 기간 단축 전망
업계는 이번 합의를 발판 삼아 중국의 반도체 산업 성장세가 더욱 가팔라질 것으로 내다봤다. 앞서 중국은 2018년 시 주석이 반도체 굴기를 선언하면서 첨단 반도체를 자체 생산해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0%까지 높이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2020년 중국의 반도체 자급률은 2014년(15.1%)과 크게 다를 것 없는 15.9%에 그쳤고, 2022년엔 4,000곳에 가까운 반도체 업체가 폐업하는 등 부진이 이어지며 실패론이 제기됐다.
당시 시장에선 첨단 기술 경쟁의 향연인 반도체 분야에서 중국이 후발주자로서 기술 부족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미국이 반도체 공급망 패권을 위해 대대적 투자와 함께 반도체지원법을 시행하고, 한국·일본·대만과 연계한 ‘칩4 동맹’을 구상하는 동시에 중국으로 수출되던 자국산 반도체를 규제하면서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물거품이 될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중국은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미국의 규제에 맞서 우선 기술 진입 장벽이 낮은 반도체 장비 분야 발전에 집중해 국산화율을 끌어올렸고, 이는 자국 반도체 공급망 강화로 이어져 파운드리 및 다른 반도체 업체 안정화와 기술 향상을 가져왔다. 자동차와 가전 등에서 반도체 수요를 자국산으로 채우면서 자급률을 높이는 데도 성공했다. 그 결과 지난해 중국의 반도체 자급률은 30%대로 급등했다.
이번 조치로 미국이 일부 하드웨어 접근을 허용하면서 중국의 기술 모방과 내재화 속도는 더욱 빨라질 전망이다. 생산 인프라와 공급망이 이미 일정 수준 확보된 상황에서 선진 칩과 설계 기술에 대한 직접 경험은 학습 기간을 단축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소프트웨어, 설계 툴, 반도체 제조 장비 등 전방위적 생태계가 뒷받침돼야 한다. 결과적으로 이번 합의는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기보다는 새로운 균형점을 찾는 과정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