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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 투자 위축, 부패 자본 확산으로 혁신 기반 약화 디지털 전환 진척 불구, 인재·자본이 기술에서 이탈 제도 개편과 위험 자본 유도로 생산성 전환 필요
본 기사는 The Economy 연구팀의 The Economy Research 기고를 번역한 기사입니다. 본 기고 시리즈는 글로벌 유수 연구 기관의 최근 연구 결과, 경제 분석, 정책 제안 등을 평범한 언어로 풀어내 일반 독자들에게 친근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기고자의 해석과 논평이 추가된 만큼, 본 기사에 제시된 견해는 원문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2024년, 인도네시아 스타트업이 유치한 벤처 투자 규모는 4억3,780만 달러(약 6,000억원)로, 거래 건수는 85건에 그쳤다. 최근 6년 사이 가장 낮은 수치이자, 전년 대비 66% 감소한 기록이다. 같은 해, 인도네시아 당국은 국영 정유사인 쁘르따미나(Pertamina)의 연료 수입 과정에서 285조 루피아(약 176억 달러, 약 24조원) 규모의 대규모 사기 사건을 적발했다. 단순히 비교하면, 기술과 창업에 쓰인 자본 1루피아가 부패로 유출된 자본 40루피아와 경쟁해야 하는 셈이다.
이러한 격차가 지속된다면 연간 5% 안팎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도 더 이상 역동성의 지표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비효율과 부패를 가리는 외피에 불과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는 지금 제도적 전환점에 서 있다. 1990년대 초 일본과 2010년대 들어 한국이 경험한 것처럼, 혁신보다 특권을 좇는 경제 구조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제 성장 여부가 아니라 성장의 질이다. 투자 및 규제 체계가 인재를 기술 개발로 유도하느냐가 관건이다.

디지털 기반 구축, 기회 확장은 시작
지난 10년간 인도네시아는 디지털 인프라 구축에 의미 있는 성과를 냈다. 정부는 '팔라파 링(Palapa Ring)' 프로젝트를 통해 전국에 광대역 인터넷을 연결했고, 농촌 지역까지 온라인 접속이 가능해졌다. 전자상거래는 빠르게 확산됐고, 행정 서비스 디지털화도 본격화됐다. 국민 신분증과 연계된 디지털 행정 시스템은 보조금, 의료, 세금 납부에서 효율성을 높였다.
이러한 연결은 소외됐던 지역과 계층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다만, 인프라 확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연결을 넘어 혁신으로 이어지게 하려면 정책의 초점이 '접속률'에서 '창출 역량'으로 이동해야 한다. 연결된 디지털 경제가 단순 소비를 넘어 창의와 생산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부패가 다시 기회를 잠식할 수 있다.
부패가 아닌 역량에 주목해야
인도네시아의 부패 문제는 종종 처벌이나 행정 단속을 통해 조명된다. 그러나 이는 이미 문제가 발생한 뒤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구조적 해법과는 거리가 있다. 핵심은 부패가 드러나기 전, 인재가 어떤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됐느냐에 있다. 인도네시아는 평균 연령이 30세 이하로 젊고, 고등교육 진학률도 상승세다. 이 시기의 교육과 초기 경력 설계에 따라 수백만 명의 선택이 갈린다. 지금 제도가 공정한 경쟁과 역량 축적을 유도하지 못하면, 편법과 특권이 합리적인 선택처럼 여겨질 수 있다. 반면 방향을 바로잡는다면, 인구 구조의 강점을 생산성과 혁신으로 전환할 수 있다. 생산가능인구 비중은 2030년 정점을 찍은 뒤 감소세에 들어갈 전망이다. 제도 개편은 다음 의회 임기 안에 실행돼야 실효성을 거둘 수 있다. 지금의 선택이 미래의 경로를 좌우하게 된다.
수치가 말하지 않는 것들
2024년 인도네시아는 글로벌 혁신지수에서 54위를 기록했다. 겉보기에 괜찮아 보이지만, 세부 항목을 보면 경고 신호가 선명하다. 순위 상승을 이끈 건 ‘시장 정교성’(35위), ‘제도 환경’(40위) 같은 외부 여건이었고, 정작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인적 자본 및 연구’ 항목은 90위에 그쳤다. 비슷한 소득 수준의 국가들과 비교해도 낮은 수준이다.

주: 스타트업 벤처 투자 유치액, 연료 수입 비리로 인한 추정 손실(X축), 금액(Y축)
세계은행에 따르면 인도네시아의 연구개발(R&D) 지출은 GDP의 0.28%로, 한국의 10분의 1 수준이다. 생산성 정체를 피하려면 최소 0.3%는 필요하다는 연구도 있다. 여기에 벤처 투자 건수도 11분기 연속 감소 중이다. 현재 수준의 투자가 지속될 경우, 2029년에도 잠재성장률은 3%를 넘기기 어렵다는 전망이 나온다. 정부가 제시한 '2045년 7% 성장' 목표와는 괴리가 크다. 반면 R&D 비중을 1% 수준으로 끌어올릴 때 성장률은 약 4.4%까지 올라갈 수 있다. 정책 개입이 없을 때 2045년까지 누적 손실은 인도네시아 전체 디지털 경제 규모에 맞먹는 수준으로 추산된다.
일본과 한국의 경험이 주는 경고
혁신을 뒷전으로 미룬 경제는 결국 성장의 동력을 잃는다. 일본과 한국의 경험이 그 사례다. 일본은 1989년 부동산 투기로 시장이 과열됐던 시기에 4%대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2024년에는 0.1% 성장에 그쳤다. 한국 역시 2024년 4분기 성장률이 0.1%로 떨어졌고, 2025년 연간 성장률 전망은 1.6%에 불과하다.
두 나라 모두 한때 고등교육과 기업 중심의 학습 전략을 통해 빠르게 산업화를 이뤘다. 일본은 대기업 주도의 공급망, 한국은 대규모 기업집단 체계를 통해 성장을 가속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구조는 점차 경쟁을 촉진하기보다는 기득권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굳어졌다. 자본은 신기술 개발보다는 내부 거래, 법률 리스크 대비, 정치적 영향력 확보 등 비생산적 용도로 흐르기 시작했다. R&D 투자 규모는 증가했지만, 실제 경제의 역동성은 점점 약화됐다.
인도네시아는 아직 이 단계에 도달하지 않았지만, 유사한 징후는 보인다. 부동산 중심의 자산 증가, 소수 대기업에 자본 집중, 기술 인력보다 법률 서비스 비용이 더 빠르게 오르는 구조 등이 그것이다.

주: 인도네시아, 일본, 한국(X축), 비율(Y축)/GDP 대비 R&D 지출 비중(진한 파랑), 실질 GDP 성장률(연한 파랑)
자본 규제 방향부터 바꿔야
자본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혁신은 멈춘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연기금 등 주요 기관투자자는 자산의 4.3%만 벤처나 사모펀드에 투자할 수 있다. 싱가포르 중앙 공적연금의 절반 수준이다. 이 비율을 8%로 올리면 약 30억 달러(약 4조2,000억원)의 장기 자본이 시장에 유입된다. 이는 2024년 전체 벤처 투자 유치액을 웃도는 규모다.
투자 확대만큼 중요한 건 신뢰 회복이다. 국제투명성기구에 따르면 인도네시아의 부패인식지수는 100점 만점에 37점으로 180개국 중 99위다. 신뢰를 회복하려면 세관 데이터를 기계 판독이 가능한 형태로 전면 공개하고, 유류 수입량과 자동 대조하는 시스템 등 정보 기반 감시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한편, 산업별 규제 특혜에는 일정 비율의 기술 기금 납부를 의무화하는 '상쇄 제도' 도입도 검토할 수 있다. 이는 현재도 국민이 부담하고 있는 기회비용을 제도화해 회수하자는 취지에 가깝다.
착취보다 혁신이 이득인 구조로
인도네시아 정부의 창업 허가 간소화 정책으로 창업 소요 기간은 2019년 평균 52일에서 2024년 18일로 줄었다. 하지만 중견 제조기업이 실제로 사업을 시작하려면 여전히 30개 이상의 인허가 절차를 거쳐야 한다. 베트남은 6개에 불과하다.
복잡한 규제가 많을수록 '통행세'가 생기고, 제도의 전략적 남용 가능성도 커진다. 이를 제어하기 위한 방안 중 하나가 '혁신 상쇄법'이다. 특정 기업이 독점적 권한이나 규제 혜택을 받을 경우, 그에 상응하는 개방형 기술 공모를 후원하도록 의무화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수산업에서는 제도가 산업 전환을 이끌어냈다. 2024년 블록체인 기반 이력 추적 시스템이 도입된 후 1년 만에 수산물 수출액은 22% 증가했다. 이력이 명확한 상품이 더 높은 가격에 거래된 덕분이다. 규제가 단순히 비용이 아니라 경쟁력으로 작동한 사례다.
지금은 선택의 시간
인도네시아는 현재 창의성보다 특권이 더 높은 보상을 받는 구조에 놓여 있다. 그러나 방향은 바꿀 수 있다. 연기금 자본이 기술 혁신에 투자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고, 국가가 부여하는 특혜에는 혁신 투자 의무를 명문화해야 한다. 반대로 이 시기를 놓치면 인도네시아도 일본과 한국이 겪은 저성장 구조에 갇힐 수 있다. 하지만 이들과 달리 재정적 완충 장치가 부족한 인도네시아는 충격에 더 취약할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건 분명하다. 보상의 기준을 혁신으로 전환하고, 특권과 착취가 더는 수지맞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Rent or Reinvention: Indonesia’s Last Chance to Innovate Before the Rent‑Seeking Spiral | The Economy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2차 저작물의 저작권은 The Economy Research를 운영 중인 The Gordon Institute of Artificial Intelligence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