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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둔화에 몸살 앓는 파워반도체업계 독일 인피니언·미국 온세미 등 감원 바람 中 자체 공급망 강화에 직격탄

전기차(EV) 시장 성장세가 둔화하면서 전기차 핵심 부품인 파워반도체 분야에서 구조조정 바람이 일고 있다. 업계 선두 주자인 독일 인피니온 테크놀로지스를 비롯해 미국과 유럽의 주요 기업들이 잇따라 인력 감축에 나섰고, 일본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는 투자를 연기하는 등 시장 전반에 위기감이 감도는 분위기다.
전기차 안 팔리는데 고속 충전 필요하나
27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파워반도체 세계 1위 업체 독일 인피니온은 직원 1,400명을 해고하고, 또 다른 1,400명에 대해서는 업무를 전환해 배치할 예정이다. 2위 기업인 미국 온세미도 구조조정을 통해 약 1,000명을 줄일 계획이고, 3위 업체인 스위스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는 조기 퇴직자를 모집할 방침이다. 일본 르네사스는 야마나시현 공장의 파워반도체 양산 개시 시점을 연기하고 연내 수백 명을 퇴직시키기로 했다. 르네사스 공장 가동률은 지난해 3분기 40%에서 4분기 30% 정도로 삭감됐다.
구조조정은 부품·소재 분야로도 확산하고 있다. 파워반도체용 웨이퍼(기판)를 생산하는 미국 울프스피드는 연내 전체 직원의 20%에 해당하는 1,000여 명을 해고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산켄전기는 파워반도체 복합 부품의 증산 시작 시점을 당초 예정이었던 2024년에서 2년가량이나 연기했다.
파워반도체란 시스템반도체나 메모리반도체와 달리, 전자기기에 들어오는 전력을 효율적으로 제어하는 데 필요한 핵심 부품이다. 모바일기기와 전기차에 많이 사용되는데 에너지 절약 성능과 전기차 주행거리를 좌우한다. 인공지능(AI)용 반도체와 함께 반도체 산업의 성장 분야로 꼽히며 전기차 시장 확대를 내다본 글로벌 주요 기업들이 그동안 앞다퉈 투자해 왔다.

5분 충전에 400km, BYD 신기술
파워반도체업계가 위축된 주요인은 전기차 시장의 성장 둔화다. 자동차 시장조사기관 마크라인즈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전기차 판매량은 전년 대비 9% 늘어난 약 1,137만 대였다. 판매량이 증가하기는 했으나 증가율은 2022년 75%, 2023년 30%로 급락했다. 이에 따라 파워반도체 재고도 쌓여가고 있다. 서구와 일본 업체 7곳이 파워반도체를 생산한 후 판매까지 걸리는 기간은 지난해 4분기에 99일로, 전년 동기 대비 18% 늘어났다.
업계가 부진한 또 다른 이유로는 BYD(비야디)로 대표되는 중국 전기차업계의 공급망 강화가 지목된다. BYD는 과거엔 르네사스 등으로부터 파워반도체를 조달했지만, 지난해 초부터 자체 공장을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첨단 반도체에 대한 중국 수출을 규제하자, 중국 업체들이 파워반도체에 투자를 집중해 온 결과다.
전기차업계에 따르면 왕촨푸(王傳福) BYD 회장은 지난 17일 5분 충전으로 400㎞를 주행할 수 있는 전기자동차 플랫폼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이어 “BYD는 초고속 충전소 4,000곳을 새로 건설하고, 기존 공용충전소의 고속충전 능력을 향상해 주행거리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왕 회장은 또 “신형 플랫폼의 충전은 연료 주유와 전기 충전을 같은 속도로 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며 “충전으로 사람이 차를 기다리던 시대에서 차가 사람을 기다리는 시대로 변했다”고 강조했다.
새로운 충전 플랫폼은 4월 발매하는 세단 ‘한(漢)L’과 스포츠유틸리티(SUV) ‘탕(唐)L’ 두 신차 모델에 탑재되며 예약판매 가격은 한L이 27만~35만 위안(5,400만~7,000만원), 탕L은 28만~36만 위안(5,600만~7,200만원)으로 책정됐다. BYD는 기존 전지보다 출력을 대폭 높인 1,000kW(킬로와트)로 충전을 실현해 시간을 대폭 단축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차량에 탑재하는 전지의 구조를 재구성해 모터와 공조 부품도 고전압에 맞도록 사양을 변경했다.

3분 만에 배터리 교체, 中 CATL '배터리 교환소' 3만 개 오픈 목표
이런 초고속 충전을 가능하게 만드는 건 고전압, 고전류, 고전력이다. 5분 충전으로 100㎞ 주행이 가능하고, 배터리를 10%→70%로 충전하는 데는 18분 걸린다. 현대자동차의 초급속 충전 시스템은 ‘전압 800V, 최대 전력 350㎾’이며 테슬라의 최신 V4 슈퍼차저는 ‘400~1,000V, 최대 325㎾’를 지원한다. 반면 BYD는 ‘최대 출력 전압 1,000V, 전류 1,000A, 전력 1,000㎾’을 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5분 충전이 전기차의 미래임이 분명하다고 입을 모은다. 내연기관차는 5분만 주유하면 600㎞를 가는 만큼, 전기차 충전 속도가 이와 별 차이 없게 된다면 전기차를 사야 할 이유는 훨씬 더 늘어날 것이란 설명이다. 즉 전기차가 내연기관차와 본격적으로 경쟁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중국의 자동차 분석가 레이 싱도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BYD가 게임을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렸다”고 짚었다.
이런 가운데 중국 배터리업계에서는 배터리 교환 시스템에 대한 투자도 크게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특히 중국 전기차 스타트업 니오(NIO)는 3,172개의 배터리 교환소를 설치하고 시장을 개척했는데, 이 교환소에 차량이 진입하면 운전자가 건드릴 필요 없이 자동으로 로봇팔이 나와 3분 만에 배터리를 교체해 준다. 월 14만원 상당의 이용료가 부과되지만, 지금으로선 가장 빠른 에너지 보충 방법이다.
전기차용 배터리 세계 1위 기업인 중국 CATL 역시 배터리 교환 사업 투자를 늘려가고 있다. CATL은 다양한 자동차 브랜드에 납품하는 배터리 전문기업으로, 100초 만에 배터리를 갈아 끼울 수 있는 교환소를 중국 전역에 3만 개 깔겠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CATL은 니오와 손을 잡았다. 지난 17일 양사는 전략적 협업을 맺고 약 5,000억원을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양사는 이번 협약을 통해 승용차 전 제품에 대한 배터리 교환 네트워크를 공동으로 구축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