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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배터리 3사 점유율 44.1%→39%
소재 공급망 쥔 중국, 기술력도 급진
전·후방산업 걸친 구조적 위축 가시화

한국 배터리 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급격히 입지를 잃어가고 있다. 중국 배터리 업체들의 급성장 속에서 한국은 기술 혁신과 공급망 주도권 모두를 점차 상실하는 양상이다. 기술 투자 부족과 전략 부재, 글로벌 판도 변화에 대한 대응력 미비가 겹친 결과로 풀이된다. 여기에 최근에는 주요 고객인 전기차 완성차 업계의 부진까지 맞물리며 수요 감소를 본격화하는 추세다. 이에 산업계 안팎에선 전기차·배터리 업계의 구조적 재편 없이는 생존 자체를 담보할 수 없다는 진단이 나온다.
中 후발 주자 급부상, K-배터리 위기 점화
16일 에너지 전문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4월 중국을 제외한 세계 각국에 등록된 전기차용 배터리 총 사용량은 132.6기가와트시(GWh)로 전년 동기 대비 26.8% 증가했다. 같은 기간 LG에너지솔루션(LG엔솔), SK온, 삼성SDI등 한국 배터리 3사의 합산 시장점유율은 44.1%에서 5.1%p 하락해 39%를 기록했다.
제조사별 배터리 사용량에서는 LG엔솔이 전년 동기 대비 15.6% 성장한 28.9GWh를 기록하며 2위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점유율은 23.9%에서 21.8%로 하락했다. SK온 역시 24.1% 성장한 13.4GWh의 사용량으로 3위에 올랐지만 점유율은 10.3%에서 10.1%로 소폭 축소됐다. 삼성SDI의 배터리 사용량은 11.2% 감소한 10.3GWh에 그쳤고, 점유율도 11.1%에서 7.8%로 쪼그라들었다.
반대로 중국 업체들의 배터리 사용량은 높은 성장세를 보였다. CATL은 36.0% 증가한 39.3GWh를 기록했고, BYD는 127.5% 뛴 9.1GWh, 고션은 100% 늘어난 2.6GWh, CALB는 47.1% 증가한 2.5GWh를 기록했다. 중국 시장까지 포함하면 중국 배터리의 약진은 더욱 두드러진다. 지난 1분기 CATL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38.3%로 한국 배터리 3사 합산 점유율(18.7%)의 두 배를 웃돌았다.
업계 전문가들은 중국 기업들이 단순 조립형 공급자를 넘어 배터리 기술 혁신 기업으로 탈바꿈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그에 반해 한국 배터리 산업은 기술력과 공급망 다변화, 가격 경쟁력 확보라는 삼중 과제에 직면한 상태라는 평가다. SNE리서치는 “중국계 배터리 기업들의 공격적인 해외 진출과 투자 확대는 한국 배터리 기업에 새로운 과제”라며 “이는 한국 배터리 3사의 시장 점유율이 추가 하락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산업계 불신 “일본처럼 밀려날 수도”
국내 산업계에서도 우리 배터리 산업이 기술력 중심의 경쟁력을 내세워 세계 시장을 주도하던 시기는 이미 저물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최근 글로벌 배터리 시장의 핵심 격전지는 소재와 공정 효율로 옮겨갔지만, 한국 기업들은 이 같은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단 지적이다. 니켈·코발트·리튬 등 핵심 광물의 공급망 주도권을 중국에 빼앗긴 데 이어 양극재·음극재 등 주요 소재 부문에서도 중국 기업들이 압도적인 생산력과 가격 경쟁력으로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기술 개발 측면에서도 상황은 녹록지 않다. 고체 배터리, 실리콘 음극재, 차세대 전해질 등 미래 기술에 대한 투자와 상용화 수준에서 중국과의 격차가 급속히 좁혀지고 있으며, 일부 부문은 이미 추월당했다는 지적도 있다. 특히 CATL과 BYD는 자국 정부 지원을 바탕으로 대규모 연구개발(R&D)을 지속하고 있으며, 이들 기업의 기술 자료가 글로벌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과 공유되는 빈도도 늘고 있다.
반면 한국 배터리 기업들은 여전히 생산 수율 개선에 집중하는 등 전략적 방향성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에 산업계 안팎에서는 일본 배터리 산업의 몰락 과정을 한국이 되풀이하고 있다는 우려가 끊이지 않는다. 일본 역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전 세계 배터리 시장을 주도했지만, 기술 정체와 공급망 경쟁력 부족으로 급속히 입지를 잃었다. 작금의 한국 배터리 산업 역시 점유율 감소와 함께 글로벌 공급망에서 밀려나는 조짐이 곳곳에서 포착된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결국 한국 배터리 산업의 위기는 단순한 일시적 실적 부진이 아니라 구조적 취약성에서 비롯된 결과로 볼 수 있다. 기술 혁신에 대한 장기 투자 전략이 부족한 상태에서 글로벌 소재 자원 확보에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온 것이 누적된 결과로 드러났단 진단이다. 지금과 같은 기조가 이어진다면, ‘제2의 일본’이라는 꼬리표는 피하기 어렵다는 게 산업계 안팎의 일관된 평가다.

전기차 산업 ‘흔들’, 연쇄 위기 현실화
전방산업인 전기차 업계의 암울한 현실 역시 이처럼 부정적 관측에 힘을 보탠다. 핵심 고객인 전기차 업체들의 부진이 배터리 수요 감소로 직결돼 산업 전반에 악순환을 불러온 것이다. 특히 국내 대표 완성차 업체인 현대차는 전기차 시장 전략에서 혼선이 거듭되며 글로벌 시장 점유율 확대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전기차 생산 목표를 수차례 수정하면서 계획 대비 40% 수준의 인력 축소까지 예고되는 등 불확실성은 점점 커지는 추세다.
반면 중국은 전기차 시장을 중심으로 자국 내 배터리 수요 창출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BYD, 샤오미, 샤오펑 등 기업들이 저가 정책을 앞세워 자국 내수는 물론 글로벌 시장까지 빠르게 잠식하면서 중국 배터리 업체들 역시 자연스럽게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중국 전기차 업계는 셀 제조, 소재 조달, 배터리 관리 시스템(BMS) 설계 등 전 단계에서 자국 배터리 업계와 긴밀한 협력 체계를 유지하며 내수 밀착형 생태계 구축에 집중하고 있다.
이는 결국 전기차와 배터리가 분리된 산업이 아니라 밀접히 연계된 전후방 구조의 핵심 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기업들이 수요 변동에 따른 리스크게 더 크게 노출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해외 완성차 업체에 의존적인 계약 기반 공급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두 산업 모두에서 주도권을 잃어가고 있으며, 미래 모빌리티 산업에서 아예 배제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산업계 전반을 뒤덮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