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수요 폭발에 메모리·낸드 동반 급등, 글로벌 반도체 경기 회복 신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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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수요·HBM 연쇄 효과로 D램 가격 상승
낸드 재고 소진 가속, SSD·HDD 동반 강세
실적 개선 가시화에 테크 업종 리오프닝 신호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인공지능(AI) 투자 확대로 구조적 변화를 맞고 있다. 2025년 4분기 D램 계약 가격은 전년 대비 15~20% 급등하며 전통적 비수기 흐름을 깨뜨렸고, 데이터센터와 클라우드 업체들의 공격적 발주로 낸드 가격까지 동반 상승세를 보이는 상황이다. 이는 다시 공급 부족 우려로 이어지면서 반도체 업종 전반에 대한 시장의 투자심리를 되살리는 모습이다.
범용 D램 공급 부족 우려도
17일(현지시각) 반도체 전문매체 디지타임스에 따르면 최근 협상을 마친 2025년 4분기 D램 계약 가격은 15~20%가량 급등했다. 통상 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연말은 수요가 둔화하며 가격이 하향 안정세를 그리는 비수기인데, 이 같은 가격 상승세는 매우 이례적이다. 업계는 이를 AI 인프라 확충에 나선 글로벌 클라우드 서비스 제공업체(CSP)들이 공격적으로 메모리를 확보하면서 시작된 공급 부족 사태가 시장 전반으로 확산된 결과라고 보고 있다. 특히 서버·데이터센터 중심으로 범용 D램 수요가 예상보다 빠르게 늘어나면서 추가적인 가격 반등 가능성도 점쳐지는 상황이다.
시장 조사기관 트렌드포스 역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주요 D램 제조사가 당분간 서버용 고대역폭메모리(HBM)와 고부가 제품에 생산능력을 우선 배정하면서 범용 D램 공급이 타이트해질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실제로 마이크론은 최근 대형 고객사와의 협의 과정에서 단기 공급 부족을 이유로 신규 견적을 보류한 바 있으며, 여타 제조사들 역시 물량 배정 일정을 재조정하는 국면이다. 이처럼 글로벌 시장에서 통용되는 리드타임이 길어지면서 중소 고객사들은 물량 확보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실정이다.
증권가도 이러한 수급 변화를 빠르게 반영하고 나섰다. SK증권은 삼성전자 목표주가를 기존 7만7,000원에서 11만원으로 42% 이상 상향 조정했고, 미래에셋증권·NH투자증권 등 주요 하우스들도 9만원 이상으로 일제히 목표가를 높였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가 집계한 삼성전자 평균 적정주가 컨센서스는 최근 들어 8만5,750원으로 직전 대비 5.4%가량 상승했다. 이 같은 낙관론을 뒷받침하듯 삼성전자 3분기 영업이익 추정치는 한 달 만에 2.5% 상향되며 ‘메모리 불황 탈출’에 대한 전망을 구체화했다.
시장 전문가들은 이번 D램 가격 반등이 2018년과 2020년처럼 일시적 사이클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데 관측이 일치했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AI 기반 데이터센터 확충, HBM4 전환, 범용 서버용 메모리 교체 수요가 동시에 맞물린 결과라는 판단에서다. 특히 공급 측면에서 설비 증설이 제한적이고, 기존 생산능력이 HBM으로 흡수되면서 범용 D램 부족은 장기화할 가능성이 크다는 설명이다. 이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메모리 업체들이 이번 국면에서 실적 개선과 기업가치 재평가를 동시에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에도 무게가 실린다.
낸드도 동행 회복 국면 진입
메모리 반도체의 또 다른 축인 낸드 가격 역시 상승세다. 업계에 의하면 웨스턴디지털은 공식적으로 가격 구조 조정을 발표했고, 샌디스크는 일부 SSD 제품에 대해 약 10% 인상을 준비 중이다. 마이크론도 내부적으로 최대 30% 인상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결과 소비자용 SSD뿐 아니라 데이터센터급 엔터프라이즈 SSD 가격까지 동반 인상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들 기업은 고속 연산과 안정성이 필수적인 AI 워크로드 특성상 낸드 기반 SSD 의존도를 줄일 수 없어 가격 상승세는 당분간 지속될 예정이다.
이러한 추세는 HDD 시장에도 파급력을 미친다. HDD는 낸드 칩을 직접 사용하지 않지만, 대규모 원천 데이터셋을 저장하는 ‘콜드 스토리지’ 역할을 담당한다. 특히 거대언어모델(LLM) 학습을 위한 원천 데이터가 HDD에 장기 보관되는 만큼 작금의 수요 증가는 HDD 가격을 직접적으로 밀어 올린다. SSD에 비해 인상 폭은 제한적일 것이란 예측이 지배적이지만, SSD와 HDD 모두 가격 인상 국면에 들어서면서 데이터센터 운영사들의 조달 비용 증가는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는 공급 과잉과 수익성 악화로 감산과 투자 보수화를 이어가야 했던 1년 전과 비교해 상반된 풍경이다. AI 열풍과 클라우드 투자 확대로 수요 환경이 반전되며 재고 소진 속도가 빨라진 데 따른 결과로, 디램 가격 상승과 궤를 같이해 낸드도 회복 사이클로 이동하는 양상이 뚜렷하다. 한 업계 관계자는 “메모리 업체들의 즉각적인 실적 개선이 기대되는 상황”이라고 진단하며 “D램과 낸드가 동반 회복 흐름을 타는 현재의 구도는 반도체 업황 반등의 또 다른 증거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IT 인프라 CAPEX 재개 모멘텀
메모리와 낸드 가격이 동반 상승하는 흐름은 글로벌 시장 전반에서 확인된다. 미국과 대만을 비롯한 주요 반도체 기업들은 AI 인프라 투자 확산에 힘입어 실적 개선 기대가 높아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글로벌 증시에서도 반도체 업종이 위험선호 회복의 대표 섹터로 부상했다. 이는 코로나19 이후 침체했던 IT 인프라 설비 투자가 재개되는 조짐과 맞물리며 반도체 산업의 경기 회복 신호탄이 되고 있다.
주요 기업들의 실적도 이러한 기대에 부응한다. 미국 오라클은 지난 9월 클라우드 부문 수주 잔고가 4,550억 달러(약 629조원)에 달했다고 발표했으며, 해당 소식 직후 주가가 하루 만에 35.97% 급등하는 기록적인 반응을 보였다. 브로드컴 역시 AI 주문형 반도체(ASIC) 매출이 전년 대비 63% 증가했다고 공시하면서, 최근 5개월간 주가가 121% 상승해 시가총액이 1조6,000억 달러(약 2,255조원)으로 불어났다.
금리 환경 변화도 낙관론을 강화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9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 금리 인하를 결정하면서 자금조달 부담이 완화될 것이란 기대가 반도체·IT 업종 전반의 밸류에이션 개선 논리를 뒷받침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금리 인하는 기업들의 자본적 지출(CAPEX) 재개 여력을 키우고, 투자 확대를 촉진하는 핵심 요인으로 꼽힌다. 이 같은 흐름은 코로나19 이후 인력과 설비를 축소했던 글로벌 테크 기업들이 다시 확장 국면으로 전환할 기반이 마련됐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향후 글로벌 이벤트도 추가 모멘텀을 제공할 전망이다. 업계는 엔비디아가 다음 달 개발자 콘퍼런스(GTC)에서 차세대 AI 반도체 로드맵을 공개할 경우, 시장 전반의 기대감이 재차 확대될 것으로 보고 있다. 박성순 KB증권 연구원은 “글로벌 AI 인프라 투자 사이클이 지속되는 한 HBM·AI 반도체 중심의 성장 스토리는 유효하다”며 “단기적 변동성이 불가피한 만큼 구조적 성장 기업 중심의 선별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