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M 일변도 뒤흔든 엔비디아, 차세대 AI 칩에 GDDR7 탑재하며 다변화 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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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 속도·단가에서 강점 보여
그래픽 D램 시장 수요 자극
공급 업체에 미칠 파장 주목

엔비디아가 차세대 인공지능(AI) 칩 출시를 앞둔 가운데, 이른바 ‘반값 메모리’라 불리는 그래픽더블데이터레이트(GDDR)7을 병행 탑재하는 선택으로 시장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업계는 이 같은 전략이 기존 고성능 칩의 사실상 유일한 선택지로 평가받던 고대역폭메모리(HBM)의 독점 구도를 약화할 것이란 진단을 내놨다. 나아가 이 과정에서 삼성전자가 주요 공급사로 부상하며 글로벌 메모리 시장 경쟁 구도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프리필-GDDR7, 디코드-HBM4
15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엔비디아가 내년 출시 예정인 차세대 AI 칩 ‘루빈CPX’에는 속도에 특화된 GDDR7이 탑재될 예정이다. 해당 전략을 통해 엔비디아는 루빈CPX의 전체 메모리 비용을 전작 대비 5분의 1 수준으로 낮추면서도 R200 칩의 60% 성능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단순 메모리 교체 차원을 넘어 AI 추론 구조를 재설계하고, 비용과 성능의 균형을 이루려는 시도로 읽힌다.
일반적으로 범용 그래픽카드에 탑재되는 GDDR7이 고성능 AI 칩에 적용되는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엔비디아는 루빈CPX를 통해 이러한 구분을 허물었다. 프리필 단계와 같이 연산 속도가 중요한 작업에는 GDDR7을 배치하고, 디코드 단계처럼 대용량 데이터를 다뤄야 하는 과정에는 HBM4를 활용하는 분업형 설계를 적용한 것이다. 이는 저사양 전용으로만 여겨지던 GDDR7의 활용 범위를 고사양 AI 반도체로 확장한 사례이자, AI 추론 효율성을 끌어올리려는 엔비디아의 전략적 실험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변화에는 HBM의 지나치게 높은 단가와 공급 제약이 작용했다. HBM은 대역폭이 넓고 효율성이 높지만, 제조 난도가 높아 가격 부담이 크고 생산 수율도 다소 불안정하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세미애널리시스는 GDDR7이 HBM 대비 기가바이트(GB)당 가격이 50%가량 저렴하다고 분석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 엔비디아는 이러한 가격 경쟁력을 활용해 데이터센터 운영비를 절감하고, 더 많은 연산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셈이다.
한편, 루빈CPX에 들어갈 GDDR7은 물량의 상당 부분은 삼성전자가 공급할 전망이다. 이미 엔비디아는 삼성전자에 게이밍용 블랙웰 GPU에 탑재할 16Gb GDDR7을 분기당 3,000만~3,500만 개 주문한 상태다. 이에 업계에선 루빈CPX에서도 유사한 조달 양상이 재현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삼성전자와 함께 D램 3강 체제를 이룬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의 경우, HBM3E(12단) 공급에 캐파가 집중된 만큼 GDDR7 대응 여력에선 삼성전자가 압도적이란 평가다.
업계 전반 ‘혼용 전략’ 채택 추세
엔비디아가 고성능 AI 칩에 GDDR7을 적용한 것은 루빈CPX가 처음이 아니다. 이미 게이밍용 그래픽카드 지포스 RTX5090에도 GDDR7을 적용했고, 중국 시장을 겨냥한 ‘B40’ 칩에도 GDDR7을 탑재할 계획이다. 특히 미국의 대중국 수출 규제를 충족하기 위해 성능을 낮춘 B40에선 HBM 대신 대역폭이 낮은 GDDR7을 사용해 사양을 조정하는 방식을 택했다. 업계는 올해 B40 출하량이 최소 100만 대, 내년에는 최대 500만 대까지 증가할 것으로 보고 있다.
여타 업체들 가운데도 GDDR 계열을 택한 곳이 속속 눈에 띈다. 일례로 캐나다 AI 반도체 스타트업 텐스토렌트는 지난해 AI 가속기 ‘웜홀’에 24GB GDDR6를, 올해 발표한 ‘블랙홀’에는 32GB GDDR6를 탑재했다. 비록 세대 차이는 있지만, AI 추론 중심의 신흥 기업들이 GDDR 메모리를 실전 배치하고 있다는 점은 GDDR이 성능 측면에서 절대적 우위에 선 HBM의 한계를 보완할 대안으로 실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업계 전문가들 또한 “HBM 수요는 급증하는데 공급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라며 “GDDR7이 새로운 용처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특히 AI 추론은 학습 단계만큼의 대역폭이 요구되지 않기 때문에 대량 생산이 가능한 GDDR7이 시장 전반에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진단이다. 일각에선 GDDR7만으로는 고사양 AI 서버를 안정적으로 구동하기 어렵다는 신중론도 제기되지만, 엔비디아가 시장의 방향타를 바꾸면서 경쟁사들도 비슷한 혼용 전략을 채택할 가능성이 커지는 양상이다.

‘듀얼 공급사’ 지위 오른 삼성전자
이러한 변화는 메모리 공급사, 특히 삼성전자에 직접적인 변화를 불러올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최근 평택 캠퍼스 내 그래픽 D램 생산라인을 증설해 이르면 이달부터 가동을 시작한다. 해당 라인은 당초 차세대 제품용으로 준비됐지만, GDDR7 수요 급증에 맞춰 조기 전환됐다. 삼성전자는 이번 증설을 통해 엔비디아의 루빈CPX 물량뿐 아니라 향후 게이밍·데이터센터용 GPU까지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한다는 구상이다.
기술 선도 측면에서도 삼성전자는 경쟁사들을 압도한다. 2022년에는 세계 최초로 GDDR6를 개발했고, 이듬해 7월에는 GDDR7을 업계 최초로 선보였다. 또 지난해 10월에는 12나노 공정을 적용한 24GB GDDR7 양산에도 성공했다. 삼성전자 GDDR7은 이전 세대 대비 두 배인 최대 48Gbps의 속도를 구현하면서 AI 추론용 칩에서도 충분한 경쟁력을 확보했다는 평을 이끌었다. 이러한 기술적 진보는 삼성의 공급 지위가 단순 발주처 확보를 넘어 새로운 시장 수요를 발생시킬 가능성을 시사한다.
미국 시장조사업체관 인더스트리 그로스 인사이츠는 그래픽 D램 시장 규모가 2018년 32억 달러(약 4조4,000억원)에서 2030년 48억 달러(약 6조6,000억원) 수준까지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 과정에서 GDDR7은 AI 반도체와 고성능 그래픽카드 모두에 적용될 수 있어 성장세의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란 예측이다. 이는 곧 공급사 입장에서 단가 경쟁력이 높은 GDDR7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새로운 매출원으로 직결됨을 의미한다.
삼성전자는 HBM과 GDDR7을 동시에 공급하는 유일한 기업으로 꼽힌다. HBM이 여전히 초고성능 학습용 칩의 필수 메모리라면, GDDR7은 비용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추론용 및 범용 GPU에서 빠르게 채택될 전망이다. 삼성전자의 이번 평택 라인 증설이 단기 수요 대응에 그치지 않고 글로벌 메모리 생태계의 중장기 재편까지 가속할 것이란 분석에 힘이 실리는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