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자유 보장 ‘연결차단권’, 노동시장 이어 금융시장까지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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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이어 아시아도 제도화 논의
팬데믹 이후 원격·언택트 근무 증가
국경 및 시간 초월한 업무 모델 확산

유럽을 중심으로 확산한 ‘퇴근 후 연결차단권’이 근로자의 시간 주권을 보장하는 제도로 자리 잡는 양상이다. 버전 관리 시스템과 협업 툴을 통한 비동기적 근무 환경은 제도 확산의 배경이 됐고, 많은 글로벌 기업이 이를 토대로 국경과 시간대를 넘어선 새로운 업무 모델을 구축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금융시장 또한 24시간 대응을 요구하는 글로벌 경쟁과 맞닥뜨렸고, 새로운 균형 과제를 해소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노동자엔 권리를, 기업엔 합리적 운영을
5일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최근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연결차단권과 공정한 원격근무에 관한 잠재적 이니셔티브’ 2단계 협의를 진행 중이다. 이는 2021년 유럽 의회 입법 촉구에 따른 후속 절차로, 노사 등 사회적 파트너는 오는 10월 6일까지 의견을 제출해야 한다. 제도가 본격적으로 법제화된 것은 2017년 프랑스가 근로자의 연결차단권 보장을 위한 단체협약 협상을 의무화한 사례였다. 이후 스페인은 2018년 디지털권리법, 포르투갈은 2021년 원격근무법으로 각각 근무시간 외 연락 금지 조항을 도입했고, 유럽사법재판소 역시 “자택 대기 시간이 개인 생활을 심각하게 제약한다면, 근로 시간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판단해 연결차단권 법제화의 촉매가 됐다.
이 같은 제도의 작동 배경에는 협업 방식의 변화가 자리한다. IT 분야로 관찰 범위를 좁혀 보면, 소프트웨어 개발 현장에서 활용되는 깃허브(Github)는 업무를 당겨오고(pull) 내보내는(push) 코드를 통해 특정 업무의 변경 이력과 책임자를 기록한다. 야간에 수행된 작업은 기록과 검토 과정을 거쳐 다음 업무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결함이 발견되면 히스토리를 근거로 원인과 책임을 손쉽게 특정한다. 이처럼 기술적 장치가 뒷받침되면서 연결차단권은 추상적 권리가 아닌 ‘현장에서 실현 가능한 제도’로 자리 잡게 됐다.
그 결과 연결차단권이 보장하는 효과 또한 휴식권을 넘어섰다. 유럽은 2018년 ‘마착 판례’를 통해 짧은 응답 대기조차 근로시간에 포함될 수 있다는 해석을 제시해 초과근무 산정과 휴식시간 보장을 강화했고, 호주는 법률에 불합리성 판단 기준을 명시해 합리적 예외를 규정했다. 이러한 제도의 변화는 기업 입장에서 노무 리스크를 줄이는 효과로 이어진다. 인사 관리가 기록을 기반으로 운영되면서 성과 평가의 객관성이 강화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주요국들의 사례는 연결차단권이 노동자의 권리 보장과 기업 운영의 합리적 기준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은 이제 막 제도화 가능성을 타진하는 단계다. 2023년 3월 정부는 연결차단권 관련 태스크포스를 출범, 같은 해 7월 가이드라인 초안을 내놨다. 당시 가이드라인에는 근무시간 외 모바일 메신저를 활용한 업무지시 자제 권고와 사전 합의 요건 등이 포함됐으나, 법제화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업종과 직무별로 업무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 금지는 과도한 규제라는 반대 목소리가 거셌던 탓이다. 그러나 최근 조사에서는 직장인 82.5%가 연결차단권 도입에 찬성한다고 밝히면서 다시 제도화 논의에 불을 붙였다. 일과 가정의 양립, 사생활 보호는 거스르기 힘든 시대적 추세인 만큼 한국 역시 법제화가 머지않았다는 게 사회 전반의 평가다.

기록·전달 중심 ‘비동기 협업’이 대세
경영계에서도 연결차단권이 확산하는 환경에서 ‘즉각 대응’만으로는 효율적 운영이 어렵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야간이나 휴일에 발생할 수 있는 긴급 사태에 대비해 모든 직원을 상시 대기시키는 건 비용과 효율 측면에서 매우 뒤떨어진다는 판단에서다. 이에 따라 많은 다국적 기업이 시간대가 다른 글로벌 팀을 채용하는 ‘팔로우 더 선’ 전략을 취하는 모양새다. 실시간 호출 대신 기록과 전달 중심의 ‘비동기 협업’이 표준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협업 툴은 이러한 비동기 협업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일례로 칸반보드(Kanban Board)는 업무를 대기·진행·완료 단계로 시각화해 실시간 접속 없이도 업무 상태를 공유하게 한다. 개발 조직에서 활용되는 깃허브가 코드의 변경 이력과 책임을 남기는 방식처럼 칸반 역시 업무의 단계와 담당자를 명확히 해 교대 근무나 시차를 넘는 협업을 가능하게 한다. 이 같은 변화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가속화했으며, 비대면·원격근무 필요성에 따라 기업들은 사내 메신저, 화상회의, 프로젝트 관리, 영업 관리, 상담 플랫폼 등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를 대거 도입했다.
가장 대중적인 협업 툴로 꼽히는 슬랙(Slack)의 운영사 슬랙테크놀로지스가 2021년 한국의 100인 이상 기업 소속 근로자 1,001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서는 지식 근로자의 55%가 협업 툴이 업무 능력을 향상시킨다고 답했다. 빠르고 효율적인 처리(74%), 협력 증진(74%), 원격 소통 개선(73%)이 주요 장점으로 꼽혔다. 이 같은 데이터는 협업 툴이 단순한 보조 수단을 넘어 생산성과 조직 문화를 바꾸는 주체임을 보여준다.
실제로 근로자의 64%는 팬데믹 기간에 채택된 협업 툴과 워크플로가 사무실 복귀 이후에도 유지되기를 원한다고 답했고, 직원 유지율에도 긍정적 영향을 준다는 응답이 49%에 달했다. 또 근로자 41%는 재택근무 유연성이 없는 경우 다른 직장을 찾겠다고 밝혀 ‘업무 유연성’이 채용·유지의 핵심 조건이 됐음을 시사했다. 비동기 협업과 기록 중심의 업무 방식이 근무 형태의 변화를 이끄는 데 끝나지 않고 인재 확보를 위한 기업의 경쟁력으로 거듭난 셈이다.
다만 그 이면에는 한계도 존재한다. 근로자의 40%는 평균 6개 이상의 앱을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하루 평균 17회 앱 전환에 약 30분을 소요한다고 답했다. 심지어 앱이 잘 통합되지 않아 오히려 업무를 복잡하게 만든다는 응답은 24%에 달했다. 외부 협업에서도 평균 3.8개의 플랫폼이 사용되며, 36%는 5개 이상을 병행한다고 답했다. 이 때문에 근로자의 58%는 외부 협업을 위한 단일 플랫폼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통합된 솔루션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글로벌 경쟁 사이 균형점 찾기
이 같은 맥락에서 보면, 근로자들의 업무 방식은 이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진단할 수 있다. 팬데믹 이후 기업들은 원격근무를 통해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운영을 정착시켰고, 클라우드 서비스 기업 드롭박스가 도입한 ‘버추얼 퍼스트(Virtual First)’ 모델처럼 기록과 시스템을 통해 시차와 국경을 넘어 협업이 유지되는 사례도 늘었다. 이를 두고 신재용 드롭박스 한국·베트남 비즈니스 매니저는 “기업은 이제 직원들이 ‘어디에서’보다 ‘어떻게’ 일하느냐에 더 주목한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처럼 글로벌 기업들이 기록과 절차를 중심으로 협업을 재구성하는 흐름은 근로자의 시간 주권 보장과도 연결된다. 근무시간 이후 응답을 강제하지 않으면서도 시차가 다른 지역으로 업무를 넘겨 서비스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록이 남는 시스템은 업무의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고, 순환 근무 형태의 운영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다시 연결차단권 확산과 비동기 협업 툴 도입이라는 제도·기술적 변화와 맞물려 조직 운영의 새로운 표준으로 부상하는 형국이다.
글로벌 금융시장 또한 이 같은 변화의 영향권에 있다. 지난 1월 기준 뉴욕증권거래소(NYSE)와 나스닥의 시간 외 거래 비중은 전체 거래의 11%에 달했다. 유럽과 아시아 투자자들이 각자의 업무 시간 외 미국 증시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확대한 결과다. 현재 이들 두 거래소는 프리마켓(오전 4시~9시 30분), 정규장(오전 9시 30분~오후 4시), 애프터마켓(오후 4시~8시)으로 이어지는 하루 16시간 거래 체제를 운영 중이다.
미국은 내년 하반기부터 거래시간을 주 5일, 24시간으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해외 개인투자자들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미국 외에도 영국과 아일랜드, 홍콩 등이 증시 거래시간 연장을 추진 중이며, 한국거래소도 증권사 및 유관 기관을 대상으로 관련 설문을 진행 중이다. 다만 무리한 거래시간 연장이 유동성 분산과 변동성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 또한 거세다. 이에 시장은 일괄적 개편보다는 각국의 상황과 수요에 맞춘 조율을 거쳐 새로운 거래시간 모델을 모색하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