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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자산 관련 정책 사전 유출 의혹
추가 비축 없는 행정명령에 시장 실망
리플 등 전략자산 예고 목록도 삭제

가상자산 시장에서 미국 정부의 전략비축 자산 지정과 관련한 정보 유출 및 부당 이익 논란이 불거졌다. 일부 거래소에서 관련 정책 발표 전후 대규모 매각이 이뤄졌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이 배후로 지목된 것이다. 전략자산과 관련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 직후 10% 넘게 치솟았던 암호화폐 대장주 비트코인 시세는 상승분을 거의 반납한 상태다.
50배 레버리지에 58억원 배팅한 ‘큰 손’ 누구?
11일(이하 현지시각) 외신에 따르면 미국의 경제학자 피터 시프(Peter Schiff)는 최근 미국 의회에 트럼프 대통령의 암호화폐 관련 정책이 사전 유출됐을 가능성에 대한 조사를 의뢰했다. 시프는 대표적인 금 옹호론자로, 암호화폐의 지속 가능성에 줄곧 의문을 제기해 왔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소셜미디어 계정을 통해 시장을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이번 발표는 사상 최대 러그풀(rug pull)일 수 있다”고 말했다. 러그풀은 암호화폐 프로젝트를 주도한 팀이 진행하던 프로젝트를 돌연 멈추고 투자금을 챙겨 잠적하는 사기 행위를 의미한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일 자신이 만든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을 통해 “비트코인을 비롯해 이더리움, 리플, 솔라나, 에이다 등 5개 가상자산의 전략비축을 추진하도록 지시했다”고 밝혔다. 2월 말 8만4,000달러 선까지 떨어졌던 비트코인 가격은 트럼프 대통령의 한마디에 9만4,000달러까지 치솟았다. 이후 6일에는 트럼프 행정부의 ‘크립토 차르’ 데이비드 색스 인공지능(AI) 및 암호화폐 정책 책임자가 “트럼프 대통령이 비트코인 등 가상자산을 전략 비축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고 발표하며 또 한 차례 시장이 들썩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투자자들의 이목을 끈 사건이 발생했다. 포브스와 코인데스크 등을 종합하면 트럼프 대통령이 2일 비트코인 등의 전략 비축 추진 계획을 공개하기 몇 시간 전, 한 익명의 트레이더가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50배 레버리지에 400만 달러(약 58억원) 규모의 롱 포지션을 매수했다. 이는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가격이 단 2%만 하락해도 60억원에 가까운 돈이 전부 증발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포지션이다.
하지만 해당 트레이더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 직후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의 가격이 각각 10%와 13% 급등하자 포지션을 모두 청산해 680만 달러(약 98억 원)의 수익을 올리고 모습을 감췄다. 무모할 정도로 과감하고 정확한 매매 타이밍 때문에 시장에서는 사전 정보 유출에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암호화폐 관련 정책 계획과 일정 등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강행할 수 없는 투자 규모와 방식이라는 게 시장 참여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가족들이 암호화폐 업계와 긴밀히 엮여 있다는 점도 이 같은 의구심을 짙게 만든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식 직전 자신의 이름을 딴 밈코인을 발행해 최소 8억200만 달러(약 1조1,570억원)의 수익을 올린 바 있으며, 그의 두 아들 트럼프 주니어와 에릭은 암호화폐 플랫폼 월드리버티파이낸셜(WLFI)에 적을 두고 있다. 미국 정부가 가상화폐 시장을 부양할 경우, 트럼프 대통령 일가의 자산도 늘어나게 된다는 이야기다. 문제의 ‘투자 귀재’가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일 것이라는 시장의 추측에 무게가 실리는 배경이다.
비트코인·이더리움 상승분 모두 반납
이런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전략비축 자산 지정 행정명령의 내용까지 공개되면서 시장에 실망감을 더했다. 해당 행정명령이 암호화폐를 추가로 사들이는 게 아니라 기존 형사, 민사 몰수 과정에서 압수한 연방 정부 소유의 비트코인 등을 비축하는 것이라는 세부 내용이 알려지면서 가격이 폭락한 것이다.
미국 동부 시각으로 6일 트럼프 대통령이 암호화폐를 연방 정부의 전략 자산으로 비축하기 위한 행정명령이 발표되며 코인마켓캡 기준 비트코인 가격은 24시간 전보다 약 5% 빠진 8만4,000달러 선까지 급락했다. 비슷한 시각 이더리움도 2,100달러 선까지 6% 이상 미끄러지며 급격한 내림세를 그렸다.
상장지수펀드(ETF) 시장에서도 대규모 자금이 유출이 이어졌다. 파사이드인베스터(Farside Investors)에 의하면 지난 한 주에만 비트코인 ETF에서 총 7억4,000만 달러가 빠져나갔다. 특히 금요일인 7일에는 하루 사이 4억900만 달러가 빠지며 최악의 하루를 기록했다. 전반적인 시장 불확실성에 관련 정책에 대한 시장의 실망감까지 맞물린 결과로 풀이된다.

알트코인 매수세, ‘과도한 해석’ 탓으로
현재 미국 연방정부가 보유한 암호화폐는 비트코인 기준 약 20만 개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비트코인을 가리켜 ‘디지털 금’이라고 정의하며 “공급량이 고정돼 있어 전략적 비트코인 준비금을 최초로 만드는 국가가 되면 전략적 이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바이든 행정부를 향해 “비트코인을 상당량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글로벌 금융 시스템에서 비트코인의 전략적 위치를 고유한 가치 저장 수단으로 극대화하는 정책을 시행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비트코인 대통령’을 자처한 트럼프를 두고 시장에서는 중국 중앙은행디지털화폐(CDBC)인 ‘디지털 위안화’를 견제하기 위한 의도라는 분석이 주를 이뤘다. 중국은 인민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위안화를 26개 도시에서 결제에 사용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암호화폐는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CDBC와 달리 탈중앙화된 지급 수단으로 평가된다.
다만 트럼프 행정부는 이번 행정명령을 발표하며 시장 기대와 달리 ‘신규 비트코인 매입’은 없다고 강조했다. 공개된 행정명령에는 “미국 정부는 민형사상 자산 몰수 또는 벌금으로 수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추가적인 비축 자산을 취득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담겼다. 트럼프 행정부가 비트코인을 신규 매입함에 따라 가격이 치솟을 것이라는 시장의 관측이 보기 좋게 빗나간 셈이다.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이 전략자산으로 비축하겠다고 예고한 리플, 이더리움, 솔라나, 카르다노는 이번 행정명령에 등장조차 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색스 책임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언급은 단순히 시가총액 기준에 따른 것일 뿐”이라며 “사람들이 과도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 같다”고 책임을 투자자들의 몫으로 넘겼다. 한편, 가상자산 데이터기관 얼터너티브가 집계하는 ‘공포·탐욕 지수’는 10일 기준 24점을 기록하며 극단적 공포(Extreme Fear) 수준을 나타냈다. 해당 지수는 0에 가까울수록 극단적 공포를, 100에 가까울수록 극단적 낙관을 각각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