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행정부 ‘비자 폭탄’ 자폭수, 美 스타트업 날개 꺾고 인재 유출 가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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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1B 비자 수수료 폭탄 후폭풍 美 빅테크들 '패닉', "매년 20조원 추가 부담" 인재 확보 경쟁 조짐, 英 비자 수수료 폐지 검토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인 미국 전문직 취업 비자(H-1B) 수수료가 21일부터 10만 달러(약 1억4,000만원)로 인상된다. 현행 1,000달러(약 140만원)에서 100배 오른 것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포고문에 따른 것이다. H-1B 비자는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분야 전문직에 주어지는 비자로, 미국은 이를 통해 전 세계 인재를 빨아들임으로써 빅테크를 탄생시키고 첨단 기술 초격차를 누려왔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사망선고를 내리면서 고급 인력 유입이 사실상 막히게 됐다.
H-1B 수수료 100배 올려 1억4,000만원
22일(이하 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9일 포고문에서 “H-1B 비자는 일시적으로 부가적인 고숙련 업무를 수행하라고 마련됐지만, 미국 노동자를 저임금·저숙련 노동력으로 밀어내는 데 악용돼 왔다”며 “체계적 남용을 통해 미 노동자를 대규모 대체함으로써 경제와 국가 안보를 훼손했다”고 했다.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도 “미국을 위해 가치 있는 사람만 받아들이라는 것, 이것이 우리 이민 정책의 핵심”이라고 했다. 수수료는 H-1B 비자를 신규 신청할 때 적용되고, 비자 연장 시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개인이 이 정도 돈을 지불하거나, 기업이 비용을 후원하기는 쉽지 않다.
산업계와 주요 외신들은 이번 조치를 두고 트럼프 행정부가 최근 미국과 사이가 안 좋은 인도·중국계 고숙련 이민자들을 막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트럼프 강성 지지층인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진영이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수단으로 H-1B 비자를 지목한 데 따른 정치적 조치라는 설명이다.
또 연방 정부 적자를 틀어막기 위한 수단으로 ‘일석이조’ 효과를 노리는 전략으로도 해석된다. 현재 미국에 체류중인 H-1B 비자 보유자는 약 73만 명으로 추산된다. 미국 국토안보부·이민국(USCIS)이 미국 의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24 회계연도에 H-1B 비자를 발급받은 외국인 취업자는 39만9,395명이다. 이 중 인도계가 28만3,397명으로 71.0%를 차지했고, 중국계가 4만6,680명(11.7%)이다.

자금 여력 부족한 스타트업에 직격탄 "혁신 둔화할 것"
이번 조치로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대혼란에 빠졌다. 인재 영입에 큰 차질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행정명령에 서명한 직후 마이크로소프트(MS)는 H-1B 직원들에게 미국에 체류하라는 지침을 보냈다. 하지만 이어 추가 이메일을 통해 “중요한 개인 사유로 해외에 있는 동료들의 귀국은 보장하겠다”면서도 “입국장에서 혼선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월가도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JP모건은 해외 체류 중인 직원에게 긴급 귀국을 권고하고 국내 직원들에게는 출국 자제를 지시했다. 골드만삭스는 임직원들에게 “불확실한 시기”라며 법률 자문을 진행 중이라는 메모를 전달했다.
미국에서 커리어를 시작하려고 계획하던 이들의 불안도 커지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부하는 인도 출신 대학원생 사티시는 블룸버그에 20여 명의 지인들이 비자 조치 발표 이후 인도로 돌아가기로 계획했다고 전했다. H-1B 비자는 미국에서 대학 또는 대학원을 졸업한 유학생들의 구직과 정착을 돕는 관문 역할을 해 왔다. 비자 수수료 인상 조치가 시행될 경우 기업들의 비용 부담이 급증할 것이란 추산도 나왔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한 해 신규 H-1B 비자 14만1,000개가 발급됐다는 점에서 기업들이 연간 140억 달러(약 20조원)를 추가로 부담하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H-1B 비자 수수료가 미국 스타트업의 인공지능(AI) 인재 채용을 막고, 빅테크 쏠림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미국 유명 액셀러레이터인 와이컴비네이터의 게리 탄 최고경영자(CEO)는 “빅테크는 새 수수료에 타격이 없겠지만 스타트업의 다리를 분질러 놓을 것”이라고 했다. 메타처럼 1억 달러(약 1,400억원)가 넘는 보상을 상위 AI 인재에게 지급하는 회사는 수수료를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지만, 현금이 부족한 스타트업은 추가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런던의 미국 비자 로펌 파트너 캐서린 베탄코트도 “대기업이 H-1B 의존도가 높다면 영향을 받겠지만, 소규모 고용주는 직원 1명분 수수료조차 불가능할 수 있다”고 했다.
H-1B 비자를 몇 장 확보하느냐가 스타트업 성패를 좌우한다는 연구도 있다. 전미경제연구소(NBER)는 보고서를 통해 H-1B 비중이 높은 스타트업일수록 톱 벤처캐피탈(VC) 투자 유치, 특허 창출, 기업공개(IPO)·인수합병(M&A) 달성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고숙련 인력 1명 추가만으로 5년 내 IPO 확률이 23% 상승한다는 결과도 제시했다. 탄 CEO는 “초기 팀은 그 ‘세금’을 삼킬 수 없다”며 “빅테크를 공고히 하고 스타트업의 숨통을 죄는 방식은 답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영국은 전문직 비자 '0원' 검토, 인재 유출 우려
고급 인재들의 해외 유출도 우려된다. 이미 영국은 H-1B 비슷한 종류의 비자 수수료를 '전면 폐지'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등 미국을 이탈한 인재 끌어들이기에 본격 나선 상태다. FT에 따르면 영국 총리 직속 ‘글로벌 인재 태스크포스(TF)’는 과학·학문·디지털 분야의 최상위 전문가를 대상으로 비자 수수료를 전면 면제하는 방안을 인재 확보 정책의 일환으로 검토하고 있다. 한 당국자는 “세계 5대 최고 대학에 다녔거나 권위 있는 상을 받은 사람을 대상으로 논의 중”이라며 “비용을 완전히 면제하는 구상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당국자는 현재 영국의 글로벌 인재 비자를 ‘관료주의 악몽’이라고 지적하며, 제도 개편은 “순이민을 줄이겠다는 우리의 결의를 저하하는 게 아니라 가장 뛰어난 인재를 영국으로 불러오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영국의 글로벌 인재 비자는 2020년 도입된 제도로, 과학·공학·인문학·의학·디지털 기술·예술·문화 등 분야에서 리더이거나 리더로 성장할 잠재력이 있는 인재에게 발급된다. 현행 신청 수수료는 1인당 766파운드(약 144만원)이며, 동반 가족도 같은 금액을 납부해야 한다. 여기에 더해 연간 1,035파운드(약 194만원)의 보건 추가요금도 부과되지만, 영국 정부는 인재 유치를 위해 이를 모두 폐지한다는 방침이다.
일각에서는 H-1B 비자 사용자의 대다수가 인도계와 중국계인 만큼 이들이 조만간 본국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진단도 나온다. 나아가 장기적으로 인도의 최고급 인재들이 AI 패권을 놓고 미국과 경쟁하는 중국계 기업으로 하나둘 건너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했다. 최고급 IT 인력 입장에서 미국을 못 가게 되면 대안이 중국 외에 마땅찮은 탓이다.
이미 중국 역시 기술 경쟁 중인 미국의 이러한 사태를 지켜보면서 우수 인재들의 중국행을 간접적으로 유도하고 있다. 궈자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22일 미국의 비자 정책 변화에 대해 따로 논평을 내놓지 않으면서도 “세계화된 세상에서는 국경을 초월한 인재 흐름이 글로벌 기술·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며 “전 세계 다양한 분야의 인재들이 인류의 발전과 경력 성공을 위해 중국에 와서 발판을 마련하는 것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저숙련 노동자의 높은 임금을 감당하지 못해 제조업 대신 IT 서비스 혁신으로 지탱되던 미국 경제가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면서 현실과 전혀 다른 폐쇄주의 실험에 빠질 상태에 놓인 모양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