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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거래 채권 규모 300억원 수준 회생신청 발표에 입점업체 분통 제2의 티메프 사태 불안감 확산

온라인 명품 플랫폼 발란이 미정산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결국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입점업체들 사이에서는 발란이 대금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자 몰래 법정관리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는데 결국 일주일 만에 사실로 드러났다. 발란 측은 미정산금 규모가 월 거래액으로 충분히 해소할 수 있는 수준이라며 조속히 상거래 채권을 변제한다는 입장이지만, 입점업체들은 '제2의 티메프(티몬·위메프)' 사태라며 불안감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발란 "3월부터 흑자 전환, M&A도 신속 추진할 것"
지난달 31일 발란은 최형록 대표이사 명의로 입점업체에 공지를 발송해 "파트너사의 상거래 채권을 안정적으로 변제하고 플랫폼의 지속 가능성을 제고하기 위해 서울회생법원에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했다"고 밝혔다. 미정산금 등 재무적 문제와 관련해서는 "소비자에게 금전적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고 미지급된 상거래 채권도 발란의 월 거래액보다 적은 수준"이라며 "3월부터는 흑자 기반을 확보한 상태"라고 최 대표는 설명했다. 발란에 입점한 파트너사는 1,300여 개로 월평균 거래액은 300억원이다. 현재 미정산 대금은 130억원 수준으로 추산한다.
발란이 미정산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회생절차에 돌입하면서 입점업체들 사이에서는 불신과 위기감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입점업체 점주 800여 명이 모인 오픈채팅방에는 '대금 정산이 지연된 상황에서 발란의 모든 공지가 거짓말인 것이 드러났다', '미정산 대금이 1조원을 넘어선 티메프 사태 때와 상황이 똑같다'는 등의 격한 반응이 쏟아졌다. 이에 대해 최 대표는 "가장 중요한 채권자는 바로 파트너 여러분"이라며 "회생 인가 전에 인수·합병(M&A)을 신속히 추진해 인수자를 유치함으로써 상거래 채권을 신속히 변제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달 24일 발란은 내부 점검 과정에서 정산금이 과다 지급된 오류가 발견됐다며 당일 정산 주기가 도래한 일부 입점업체에 대금을 지급하지 못했다. 이틀 후인 26일, 재정산 작업을 마무리하고 28일까지 대금과 지연 이자 등을 포함해 확정 정산액을 지급하겠다고 공지했지만, 당일 오후부터 신규 결제를 막으며 사실상 잠정 폐업 상태에 들어갔다. 28일에는 최 대표 명의의 사과문을 통해 "조금만 기다려 달라"며 "다음 주 직접 만나 경위와 계획을 설명하겠다"고 해명했으나 결국 발란은 미정산금을 해결하지 못한 채 회생절차 신청을 공식화했다.

티메프 이어 발란까지, 이커머스 구조조정 현실화
전문가들은 지난해 티메프(티몬·위메프)에 이어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이커머스 업계의 구조조정이 가속화할 것으로 전망한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비대면 소비 확산으로 이커머스 침투율은 올해 2월 기준 55.6%까지 증가했다. 명품 플랫폼인 발란을 비롯해 오늘의 집, 무신사, 마켓컬리 등 버티컬 커머스도 빠르게 성장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문몰의 연간 거래액은 팬데믹 직전인 2019년 47조원 수준에서 2023년 100조원을 돌파하며 112% 급증했다. 같은 기간 네이버·쿠팡 등 종합몰 거래액은 89조원에서 141조원으로 58% 증가했다.
하지만 최근 이커머스 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든 데다 알리익스프레스, 테무 등 중국 플랫폼의 공세에 경기 불황까지 더해지며 업계 전반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특히 우후죽순 늘었던 전문몰 중 경쟁력이 떨어지는 업체의 폐업이 잇따르고 있다. 오늘의 집과 인테리어 플랫폼 양강 구도를 이뤘던 집꾸미기는 지난달 31일 운영을 종료했다. 지난해에는 문구 온라인 쇼핑몰 바보사랑, 가전·가구 편집숍 알렛츠, 디자인 상품 쇼핑몰 1300K 등이 문을 닫았다. 한편 무신사, 마켈컬리 등 생존한 플랫폼들은 수익성 확보를 위해 카테고리를 확장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티메프와 발란 사태가 이커머스 업계의 '미정산 포비아'를 확산시킬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두 사태 모두 단순히 개별 기업의 상품 경쟁력이나 마케팅 전략의 실패가 아니라, 이커머스 업계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커머스 시장의 마케팅과 할인 경쟁이 과열되면서 대부분의 플랫폼은 단기적인 유동성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지속 가능한 수익 모델을 구축하지 못했다. 결국 이들은 자금 경색에 직면했고, 이로 인해 미정산 사태가 발생하며 재무 건전성 악화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최근 명품 시장 침체 속에 정상화까지 한계 우려
특히 발란의 경우 명품 플랫폼의 특성상 경영 정상화까지는 상당한 어려움이 겪을 것으로 보인다. 명품 시장은 글로벌 브랜드와 셀러들의 신뢰가 중요한 데다, 최근 명품 플랫폼 시장 자체가 부진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 베인앤드컴퍼니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개인 명품 시장 규모가 3,630억 유로(약 538조원)로, 전년 대비 2% 감소했다. 베인앤드컴퍼니는 "명품 시장 규모가 줄어든 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팬데믹 기간을 제외하고 15년만"이라며 "명품 시장이 현재 구조적 변화를 겪고 있다"고 분석했다.
국내에서도 명품 플랫폼의 운영 중단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해 12월에는 이랜드글로벌이 운영하는 명품 플랫폼 럭셔리 갤러리가 운영을 중단했다. 2020년 출범한 럭셔리 갤러리는 2022년 매출이 220억원대까지 성장했지만, 이듬해 매출이 184억원대로 줄면서 120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최근에는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웰니스 사업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올해 1월에는 명품 프리 오더 플랫폼 디코드가 운영을 중단했다. 앞서 문을 닫은 캐치패션과 한스타일을 포함해 1년 새 명품 플랫폼 4곳이 운영을 중단했다.
대형 이커머스 업체들이 명품 판매에 뛰어들면서 경쟁이 심화한 것도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SSG닷컴, 롯데온 등 백화점을 계열사로 둔 이커머스 플랫폼을 비롯해 쿠팡, 컬리 등도 고객 접점 확대와 서비스 차별화 등을 이유로 명품 판매를 강화하는 추세다. 투자 시장의 한파도 이어지고 있다. 티메프 정산 미지급 사태로 플랫폼에 대한 우려가 확산하면서 투자 유치가 더욱 어려워진 상황이다. 발란 역시 지난해 중국 알리바바그룹, 일본 조조타운 등으로부터 대규모 투자를 유치할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결국 추가 투자로 이어지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