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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위, 브로드컴 동의의결 절차 개시
자발적 시정방안 제시하면 사건 종결
매출액의 최대 4% 과징금 ‘없었던 일로’

공정거래위원회가 미국에 기반을 둔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Broadcom Inc.)이 국내 셋톱박스 제조사에 자사 칩(SoC)만 쓰도록 요구한 혐의에 대해 동의의결 절차에 돌입했다. 앞서 브로드컴은 잘못된 행위를 중단하고, 국내 반도체 산업 활성화를 위한 130억원 상당의 기금을 조성하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자체 시정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위법 여부 판단 안 한다
7일 공정위는 브로드컴의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와 관련해 잠정 동의의결안을 마련하고 오는 5월 7일까지 관계 부처 및 이해관계인 의견을 수렴한다고 밝혔다. 동의의결제도는 기업이 자진 시정방안을 제시하면, 별도로 위법 여부를 판단하지 않고 사건을 종결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구제책이다.
브로드컴은 국내 중소 셋톱박스 제조사들이 유료 방송사와 셋톱박스 거래 계약을 맺을 때 자사가 만든 시스템 반도체 부품을 탑재한 셋톱박스만 사용하도록 강요한 혐의를 받는다. 셋톱박스는 위성방송, 인터넷 스트리밍 방송 신호 등을 받아 TV에 띄우는 장치다. 공정위가 이 같은 혐의를 들어 조사에 착수하자, 브로드컴은 지난해 10월 동의의결 절차 개시를 신청했다.
제조사들이 셋톱박스 판매 계약 때 브로드컴 제품만 사용하도록 요구하지 않겠다는 게 브로드컴의 시정방안 주요 내용이다. 또 자사 부품을 탑재한 제품이 계약 물량의 절반을 넘기도록 강요하거나, 이에 못 미친 기업에 대해 판매를 중단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내용 또한 포함했다. 브로드컴은 이들 조치가 실효성을 갖출 자율준수제도(CP)를 도입하고, 공정위에 2031년까지 매년 이행 여부를 보고하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임직원 대상 공정거래법 교육도 연 1회 이상 실시한다는 방침이다.
공정위에 의하면 브로드컴은 시정방안과 함께 국내 반도체 생태계 지원을 위한 상생방안도 제시했다. 구체적으로는 △반도체 전문가 양성을 위한 교육 과정 운영 △설계 자동화 소프트웨어(EDA) 지원 △중소기업 홍보 지원 등이다. 브로드컴은 이러한 상생방안을 실행하기 위해 총 130억원 규모의 기금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공정위는 브로드컴이 자발적으로 제시한 시정방안을 통해 피해구제와 거래질서 개선을 도모하고, 국내 반도체 산업과 중소 사업자와의 상생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잠정 동의의결안을 공고하고 의견수렴 절차를 거쳐 제시된 시정방안과 접수된 의견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전원회의에서 동의의결 최종안을 확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스마트폰 부품 공급 중단에 삼성전자도 ‘을’ 위치
공정위의 조사 과정에서 브로드컴은 국내 최대 IT 기기 제조업체 삼성전자를 대상으로도 부당한 요구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공정위에 따르면 지난 2020년 퀄컴 등 경쟁업체가 따라오기 시작하자, 브로드컴은 삼성전자에 독점 부품 계약을 강요했다. 경쟁업체로 갈아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삼성은 처음엔 불공정한 조건이라는 이유를 들어 장기계약 체결을 거부했다. 하지만 브로드컴의 압박은 도리어 수위를 높였다. 브로드컴은 스마트폰 관련 부품 공급을 재검토하겠다고 통보했고, 삼성전자에 공급하는 모든 부품의 선적을 중단하기도 했다. 나아가 개발 및 생산단계에서의 기술지원과 일부 부품의 생산까지 중단했다.
공급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한 삼성전자는 결국 지난 2020년 5월 브로드컴으로부터 연간 7억6,000만 달러(약 1조180억원)의 부품을 구매하겠다는 내용의 계약서에 서명했다. 공정위의 조사와 유럽연합(EU) 경쟁당국의 자료제출 요구 등이 진행되면서 해당 계약은 2021년 8월 종료됐지만, 약 1년 2개월 사이 삼성이 구매한 브로드컴의 주요 부품 규모는 8억 달러(약 1조710억원)에 달했다.
이에 더해 삼성전자는 계약 조건에 명시된 구매 액수를 맞추기 위해 필요 없는 부품까지 사야 했다. 브로드컴 부품은 통상 프리미엄 부품에만 들어가는데, 보급형 모델에까지 이를 탑재한 것이다. 기존 부품을 브로드컴 부품으로 교체하면서 삼성전자가 본 피해는 1억6,000만 달러 규모로 추산됐다. 브로드컴은 “삼성은 글로벌 대기업인 만큼 부당한 요구를 거부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2020년 당시 계약에선 브로드컴의 우위가 명백하다는 게 공정위가 내린 결론이다.

1조원대 과징금 퀄컴과 상반된 제재
공정위가 이번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 것은 2019년쯤으로 알려졌다. 조성욱 당시 공정위원장은 2019년 말 취임 100일을 기념해 개최한 기자간담회에서 “2020년 1분기 정보통신기술(ICT) 전담팀에 ‘반도체 분과’를 신설해 5G(5세대 이동통신) 전환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반도체 제조사의 경쟁사 시장진입 봉쇄 행위 등을 집중적으로 감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2021년 7월에는 서울 강남구 양재동에 위치한 브로드컴 코리아를 방문해 현장 점검에 나섰다. 브로드컴의 불공정 거래 혐의가 사실로 밝혀지면, 공정거래법상 금지된 ‘경쟁사업자 배제 행위’, ‘배타조건부 거래 행위’ 등을 적용할 것이란 게 공정위의 설명이었다. 이들 행위가 사실로 드러날 경우, 공정위는 위반 사업자에 위반 기간 해당 거래 분야에서 발생한 매출액의 4% 이내에서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다.
IT 업계는 이번 브로드컴의 갑질 사건이 2016년 공정위가 역대 최고 과징금을 부과한 퀄컴 사건에 필적할 것이란 전망이 제기되기도 했다. 당시 공정위는 퀄컴이 반도체 시장에서 시장지배력을 남용한 혐의를 적발해 과징금 1조300억원을 부과한 바 있다. 이번 브로드컴의 동의의결 신청을 둘러싼 업계의 반응이 냉담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兆) 단위의 피해가 사실로 드러난 상황에서 130억원 규모의 상생 방안은 ‘솜방망이’에 가까운 제재라는 게 업계 중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