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나이키, 자사 몰 판매 고집한 것이 패착 매출 60% 차지하는 신발 판매 부진 러닝 열풍에도 호카, 온 등 약진에 밀려
한때 '혁신의 대명사'로 불리며 글로벌 스포츠 용품 시장의 강자로 군림했던 나이키가 부진의 늪에 빠졌다. 반면 지루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라이벌 아디다스는 레트로(복고) 열풍과 기술 혁신을 통해 화려하게 부활했다. 시장에서는 디자인과 기능은 물론 유통 채널 등 마케팅 전략의 차이가 승패를 갈랐다는 분석이 나온다.
나이키 vs 아디다스, 엇갈린 실적과 주가
23일(현지시각) 아디다스는 지난해 4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24% 증가한 59억6,500만 유로(약 9조12억원)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시장 전망치를 12.5%가량 상회하는 수치다. 영업이익은 5,700만 유로(약 860억원)를 달성하며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앞서 2023년 4분기에는 3억7,700만 유로(약 5,689억원) 영업손실을 낸 바 있다. 아디다스는 지난해 전체 매출이 전년 대비 11% 증가하고, 영업이익은 13억 유로를 넘어설 것으로 추정했다. 하비에른 굴덴 아디다스 최고경영자(CEO)는 "올해 모든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며 긍정적인 전망을 내놨다.
이에 반해 나이키 실적은 부진했다. 지난달 19일 나이키는 2024회계연도 2분기(2024년 9~11월) 매출이 123억5,400만 달러(약 17조9,400억원)로 전년 동기(133억9,000만 달러) 대비 7.7% 감소했다고 밝혔다. 같은 기간 순이익도 26.6% 급감한 11억6,300만 달러를 기록하며 매출과 순이익 모두 전년 동기에 비해 크게 부진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이는 월스트리트의 전망치를 소폭 상회하는 수치로 글로벌 금융 데이터 제공업체 LSEG가 산출한 시장의 실적 전망치는 매출과 주당순이익이 각각 121억 3,000만 달러와 0.63달러였다.
두 회사의 실적을 두고 시장의 반응은 엇갈렸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증시에서 아디다스 주가는 최근 6개월 동안 12.02% 상승했다. 최근 1년간 주가 상승률은 무려 50.58%로 집계됐다. 특히 실적 발표 당일에만 주가가 6.04% 오르며 52주 연속 신고가를 기록했다. 반면 실적 부진 여파로 나이키 주가는 최근 1년간 27.3% 하락했는데, 특히 지난해 6월에는 이틀 새 주가가 94.19달러에서 75.34달러로 급락했다. 아디아스의 실적 발표가 있던 23일 나이키의 주가는 74.29달러를 기록하며 2024년 초와 비교해 30% 가까이 하락했다.
수익 제고 위해 직접 판매 고집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나이키가 혁신에 뒤처지고 경쟁사에 시장 점유율을 빼앗기며 실적 부진에 빠졌다고 분석했다. 온라인 리셀 플랫폼 스탁X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나이키의 조던 운동화 판매는 전년 동기 대비 21% 감소했다. 경쟁사인 아식스와 아디다스의 판매량은 같은 기간 각각 약 600%, 90% 늘었다. 나이키 운동화 재고의 감소세도 예전만큼 가파르지 않다. 투자은행 BMO캐피털마켓 분석에 따르면 나이키 웹사이트에서 운동화 재고는 최근 몇 달간 약 20%만 매진되는 데 그쳤다.
나이키의 추락은 매출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신발이 부진한 데서 비롯됐다. 러닝이 새로운 트렌드로 떠올랐지만, 호카·브룩스 등 다양한 러닝 전문 브랜드가 약진하면서 나이키는 전혀 수혜를 누리지 못했다. 코비 브라이언트, 르브론 제임스 등 인기 스포츠 스타와의 협업을 마케팅 포인트로 삼았지만 이 역시 호응을 얻지 못했다. 과거 성공 방식에 매몰돼 호기를 놓쳤다는 평가다. 반면에 아디다스는 레트로 유행에 맞춰 가젤, 삼바 등 과거 제품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출시했고 테니스, 러닝 등 인기 스포츠에 맞춰 제품 라인업을 강화해 시장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자사 쇼핑몰을 통한 소비자직접판매(DTC)를 고집한 것도 패인으로 지목된다. 나이키는 수익성 강화를 목표로 직접 판매를 늘렸으나 오히려 이 과정에서 기존 유통망과 가격 경쟁을 해야 했고 결국 자사 쇼핑몰에서 무리한 할인에 나서면서 수익이 악화됐다. 이에 반해 아디다스는 유통 채널에 제품을 우선 공급해 소비자가 다양한 브랜드의 제품을 비교해 선택하도록 했는데 제품력이 뒷받침되자 소매점뿐만 아니라 자사 몰 매출도 자연스레 늘었다. 실제로 나이키의 1월 자사 몰 트래픽은 전년 동월 대비 15% 넘게 줄어들었지만 아디다스는 50% 이상 증가했다.
한정판 마케팅에 대한 소비자의 피로감도 커졌다. 1980년대 '에어조던'을 앞세워 왕좌를 차지한 나이키는 매 시즌마다 한정판 아이템을 내놓으며 소비자의 관심을 끌었다. 유명 인물이나 브랜드와의 협업 상품은 특정 발매 시기에만 소량 생산하는 드로우 방식으로 판매했기 때문에 구매에 실패한 소비자들은 웃돈을 주고 리셀 상품을 구매했다. 이에 따라 20만원대였던 제품 가격이 100만원까지 치솟기도 했는데, 이런 행태는 많은 소비자들로부터 불만을 품게 했다. 스니커즈 하나를 2~3배 웃돈을 주면서까지 구매해야 하는가에 대한 불만이 오랫동안 쌓여온 것이다.
32년간 나이키 근속한 엘리엇 힐 CEO 선임
월가에서는 2020년 나이키 CEO에 선임된 존 도나호(John Donahoe)에게 나이키 부진의 책임을 돌리고 있다. 도나호 CEO는 전자상거래 업체 이베이 출신으로 실적 부진의 원인으로 지목된 DTC 전환을 주도한 장본인이다. 코로나19 확산이 본격화한 시기 합류한 그는 팬데믹으로 인한 소비 변화에 맞춰 판매 방식을 바꿨다. 백화점, 스포츠 편집 매장, 이커머스 등과의 계약을 줄이고 홈페이지, 직매장을 중심으로 판매하는 전략을 내세운 것이다. DTC를 통해 더 큰 수익을 얻고 소비자 데이터도 확보한다는 전략이었지만, 당시에도 패션업계에서는 부정적인 전망이 우세했다.
CNBC에 따르면 도나호 체제 하에서 풋락커, 메이시스 등 수년에 걸쳐 이어온 도매 협력사와의 관계를 끊고 일부 제품의 생산을 중단하면서 신발 소매업체들 사이에서는 나이키에 대한 악감정이 생겨났다. 유통 채널을 통해 다른 회사의 제품과 경쟁하는 시스템을 포기하면서 제품력도 한계에 직면했다. 당초 나이키는 한정판 운동화 판매로 매출 증가를 기대했으나 이 과정에서 원가 절감을 강조하다 혁신이 사라지고 획기적인 제품을 생산하지 못했다. 결국 업계 경험이 없는 도나호를 CEO로 앉힌 것이 현재의 위기로 이어졌다는 지적이다.
논란이 지속되자 나이키는 지난해 9월 도나호 CEO를 해임하고 엘리엇 힐을 신임 CEO로 임명했다. 힐 CEO는 32년간 나이키에서 근속한 인물로 인턴부터 시작해 나이키·조던 브랜드의 모든 상업 및 마케팅 운영까지 총괄한 베테랑으로 평가받는다. 경영 위기 탈출을 위해 인재의 ‘페이퍼 스펙’보다 ‘검증된 실력’을 선택한 것이다.
시장은 힐 CEO의 복귀가 나이키 위기 극복으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실제 CEO 교체 발표 이후 회사 주가는 시간 외 거래에서 한때 10%가량 뛰었다. 구원투수로 기용된 힐 CEO는 30년 넘게 마케팅 현장을 뛴 관록으로 판매망을 복원하고 제품 혁신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난해 12월 취임 후 첫 실적발표 어닝콜에서 재고 관리를 개선해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고 할인을 피하겠다는 방침을 내놨다. 이와 함께 그는 축구·농구·트레이닝·스포츠 의류 부문과 스포츠 관련 마케팅에 주력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아울러 나이키가 주춤하는 사이에 세를 확장한 전통의 라이벌 아디다스, 뉴발란스에 더해 호카, 온 등 신규 브랜드의 약진에 맞서 기능과 디자인 혁신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