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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차 캐즘에 기술력 한계 겹치며 경영난 EU, 배터리 산업 육성 기조 타격 불가피해 전기차 시장 韓·中·日 의존 심화 가능성

유럽 최대 전기차 배터리 기업인 스웨덴의 노스볼트가 파산을 신청했다. 노스볼트는 지난해 11월 미국에서 파산 신청을 한 이후 경영난 극복을 위해 신규 자금 조달 등 다양한 방안을 모색했지만, 결국 해법을 찾지 못하고 유럽에서도 법정 관리에 들어갔다. 노스볼트의 파산으로 '관내 배터리 산업 육성'을 추진해 온 유럽의 전기차·배터리 시장에 지형 변화가 불가피한 가운데,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 속에서도 중국 전기차·배터리 기업들은 글로벌 점유율을 늘리고 있어 세계 시장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더욱 커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노스볼트, 美 파산 3개월 만에 유럽에서도 파산
12일(이하 현지시각) 폴리티코 유럽판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노스볼트는 자사 홈페이지를 통해 회사의 미래를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노스볼트 이사회는 파산 신청을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노스볼트는 "최근 몇 달간 자본 비용 상승과 지정학적 불안정, 시장 수요 변화 등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며 "이 과정에서 잠재적 파트너 및 투자자의 관심을 끌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 미래를 위해 필요한 계약을 체결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노스볼트는 2015년 테슬라 출신 임원 2명이 한국·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3국에 대한 배터리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포부로 설립했다. 창립 초기 스웨덴뿐 아니라 유럽연합(EU) 완성차 업체의 지지를 받으며 글로벌 배터리업계의 주요 플레이어로 떠올랐지만, 기술력 한계와 전기차 캐즘 등 악재가 겹치며 경영난을 겪었다. 지난해 11월 미국에서 파산보호를 신청할 당시 노스볼트의 현금 자산은 3,000만 달러(약 435억원)였던 반면에 부채는 58억4,000만 달러(약 8조4,700억원)에 달했다.
노스볼트의 파산은 당장 캐나다, 특히 퀘벡의 지역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당초 퀘벡 정부와 캐나다 정부는 노스볼트와 함께 몬트리올에 70억 달러(약 10조원) 규모의 거대한 배터리 셀 공장을 건설할 계획이었다. 이는 퀘벡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간 투자로, 퀘벡을 전기차 배터리 생산·개발의 글로벌 허브로 만들겠다는 프랑수아 레고 총리의 야심 찬 계획의 핵심 프로젝트였지만 노스볼트의 파산으로 공장 건설이 중단됐다.

中 의존도 낮추려면 EU 차원의 재정 지원 필요
'베터리 자급자족'을 추진해 온 유럽 자동차 산업의 타격도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유럽은 그동안 CATL, BYD 등 중국 배터리 제조사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노스볼트에 큰 기대를 걸었지만, 전기차 시장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며 "노스볼트 지분 21%를 보유한 폴크스바겐을 비롯해 볼보, BMW, 유럽투자은행 등 다수의 유럽 자본이 100억 달러(약 14조5,000억원)가 넘는 자금을 투입했음에도 기술력의 한계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노스볼트의 파산은 유럽 배터리 산업의 경쟁력 약화를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노스볼트와 투자자들은 스웨덴 정부와 EU가 충분한 지원을 제공하지 않은 것이 파산 사태의 배경이 됐다고 비판한다. 중국 정부가 CATL 등 자국 기업 육성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해 성과를 낸 반면, 유럽의 정책적 지원 규모는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FT에 따르면 파산 다음 날인 13일 톰 존스턴 노스볼트 임시 이사회 의장은 EU 측에 자체 배터리 공급망 구축을 위한 추가 투자를 요청했다. 그는 FT와의 인터뷰에서 "유럽 정치인들이 중국 등 아시아 배터리 제조사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데 많은 비용과 고통이 따른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유럽 배터리업계에서는 중국 기업들이 경쟁사인 노스볼트의 파산을 계기로 역내 생산설비 확보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란 우려도 제기된다. 실제로 2023년 독일에서 첫 유럽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한 CATL은 올해 연간 생산능력 100GWh(기가와트시) 규모의 헝가리 공장을 가동하고 내년에는 스텔란티스와 합작한 스페인 공장이 생산을 시작할 예정이다. 최근에는 네 번째 배터리 공장 설립 계획을 공식화했다. 이 외에도 엔비전AESC, 귀시안하이테그, CALB, SVOLT 등 중국의 배터리 제조업체들이 스페인, 독일, 포르투갈 등에서 공장을 운영하거나 설립할 계획이다.
올해도 전기차 캐즘 속에 中 기업 수혜 이어질 듯
노스볼트의 파산을 초래한 캐즘도 중국 기업에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글로벌 시장의 수요 부진이 장기화하며 전 세계 자동차 제조사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해 전 세계 자동차 판매량 증가율은 1.7%에 그쳤고, 판매량도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인 2019년 수준을 5년 연속 밑돌았다. 특히 유럽 시장의 판매 부진이 두드러졌다.
반면 중국 판매량 증가율은 4.5%로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회복세를 나타냈다. 무엇보다 전기차 시장에서의 격차는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글로벌 전기차 인도량은 전년 대비 26.1% 증가한 1,763만 대를 기록했는데, 사실상 중국 전기차 제조업체들이 글로벌 시장의 성장을 주도했다. 브랜드별로 보면 세계 전기차 판매량 1위인 중국의 BYD가 43.4%의 성장률을 달성하며 2위인 미국 테슬라와의 격차를 두 배 이상 벌렸다. 특히 BYD는 자국 시장뿐 아니라 유럽, 동남아, 남미 등 중국 외 시장에서도 점유율을 빠르게 늘리고 있다. 이에 반해 테슬라는 매출의 약 95%를 차지하는 모델3와 모델Y의 판매가 줄면서 전체 판매량이 감소했다.
이와 관련해 글로벌 금융기관 ING는 "미국과 EU가 내연기관차 규제를 지속하면서 전체 자동차 산업에 악영향을 미쳤다"며 "올해는 전기차 보조금까지 줄어 수요가 더욱 위축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글로벌 시장 침체가 지속되면서 중국이 서방국들을 앞서가고 있다"며 "올해도 전기차 캐즘이 지속돼 격차가 더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베터리 산업에 대해선 지리자동차, BYD 등이 전기차 시장에서 부상하는 데다 중국이 글로벌 배터리 생산량의 85%를 차지하는 등 공급망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고 있어 유럽 등 주요 시장에서 대중국 의존도가 확대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