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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핵심 장비업체 위상 흔들 미중 갈등 압박 속 ASML 시총 붕괴 생존법 다시 쓰는 ASML, 로비팀 확충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기업으로 꼽히는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기업 ASML이 미·중 관세 전쟁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중국 수출 제한과 미국의 관세 정책 불확실성으로 고전하며 1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시가총액이 절반 가까이 증발하는 등 ASML의 위상이 흔들리는 양상이다. 이렇듯 공급망과 안보 전략이 충돌하는 지정학의 교차로에서 ASML은 미래 전략을 다시 짜고 있다.
ASML CEO “美 정책에 반도체 공급망 위태”
8일(이하 현지시각)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크리스토프 푸케(Christophe Fouquet) ASML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인터뷰에서 “미국 정부 정책 하나로 수십년간 이어온 반도체 공급망이 흔들리고 있다”며 “이는 인공지능(AI) 기술 발전 속도를 늦추고 중국의 반도체 국산화를 오히려 가속화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ASML이 생산하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는 한 대 가격만 4억 달러(약 5,530억원)에 달하며 트럭 여러 대 분량의 부품이 들어가는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기계’로 평가된다. 미국, 유럽, 아시아 수백 개 기업이 부품을 공급하고 있어 글로벌 협력 없이는 제작 자체가 불가능하다. EUV 노광장비는 스마트폰, AI 칩, 자율주행차 반도체 등 차세대 기술의 핵심을 담당한다.
ASML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장기간 흔들림 없는 투자다. ASML은 1995년 미국 뉴욕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상장된 뒤 EUV에 주목했다. ASML은 이 기술이 반도체 제조의 미래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 EUV는 워낙 어려운 기술이었기에 다른 경쟁 기업들은 선뜻 투자하기를 꺼렸다. 그럼에도 ASML은 EUV를 고집했다. 첫 견본 기계가 나와 검증을 위해 벨기에의 연구기관에 맡겨진 건 2006년으로, 상용화는 이로부터 12년 뒤인 2018년에 가능했다.
ASML의 공급망 통제도 성공의 핵심 요소로 꼽힌다. 일찍이 핵심 기술과 관계된 회사들을 인수해 자사의 울타리 안에서 고유의 기술을 길러냈다. 2013년 미 샌디에이고에 본사를 둔 광원 제조기업 사이머를 9억5,000만 유로(약 1조4,000억원)에 인수한 것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4월 퇴직한 전 최고기술책임자(CTO) 마르틴 반 덴 브링크는 ‘MIT 테크놀로지 리뷰’에 “우리의 성공은 그들의 성공에 달려 있다”고 했다. 인수한 기업들의 기술이 ASML 경쟁력의 핵심이란 뜻이다.
11개월 만에 시총 30% 증발
그러나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유럽산 제품에 50%의 관세를 부과한다고 발표했다가 이틀 만에 철회하는 등 ASML의 사업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정부는 중국에 대한 수출 규제 완화를 논의하려다 내각 붕괴로 협상이 중단됐고, 미국은 지난 2019년부터 EUV 장비의 대중 수출을 막기 위해 네덜란드를 설득해 왔다. 여기에 더해 조 바이든 전 행정부는 구형 장비까지 규제 대상에 포함시켰다.
미국의 대(對)중국 수출 규제도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전략적 리스크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EUV 리소그래피 장비 및 고출력 나노미터 공정용 High NA 장비에 대한 중국 수출이 막히면서 핵심 매출원에 직접적인 타격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지난해 2분기까지만 해도 전체 매출의 절반을 차지했던 중국 매출 비중은 현재 25%까지 떨어졌다.
시가총액도 대폭 고꾸라졌다. 지난해 7월 4,295억 달러(약 583조원)에 이르렀던 ASML 시총은 8일 종가 기준 2,600억 달러(약 352조원) 아래로 떨어졌다. 1년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주가가 30% 넘게 빠진 것이다. 프랑스 투자은행(IB) ODDO BHF의 스테파네 후리(Stephane Houri) 애널리스트는 “미국의 대중국 규제를 둘러싼 우려가 집중되고 있어서 이 분야의 모든 장비 제조업체들이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중국 수출 제약은 매출뿐 아니라 기술 경쟁력 유지 측면에서도 중대한 변수가 되고 있다. 특히 고가의 EUV 장비가 중국 시장에서 배제되면서 향후 ASML의 실적 회복 경로는 더욱 복잡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글로벌 반도체 산업 내 핵심 공급망에 대한 구조적 변화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유럽 반도체 자립 목표 ‘반도체 연합’ 결성
이처럼 ASML은 기술적으로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지만, 지정학적 현실에서는 을의 처지에 놓여 있다. 미국은 자국의 안보를 명분으로 글로벌 기술 공급망을 정치화하고 있으며, 중국은 이를 기술 봉쇄로 규정하며 자체 기술 개발에 사활을 걸고 있다. 실제 화웨이를 포함한 중국 기업들이 ASML 전 직원을 채용해 자체 장비 개발에 나섰다는 보고도 나온다.
이 과정에서 ASML은 어느 쪽에도 확실히 기댈 수 없는 회색지대에 갇혀 있다는 평가다. 특히 ASML의 전 최고경영자(CEO) 페터르 베닝크가 언급한 “수십 년 지속될 이념 전쟁”이라는 표현은 ASML이 더 이상 기술 경쟁력만으로 생존할 수 없음을 함의한다. 고객 다변화나 기술 고도화만으로는 지정학적 리스크를 상쇄할 수 없으며, 결국 기업 차원에서 외교·안보 리스크를 고려한 전략적 포지셔닝이 필요해졌다는 의미다.
또한 미국의 압박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ASML은 자사 기술의 전략적 가치를 무기화하고 싶은 미국과 이를 지속적으로 확보하고자 하는 중국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기 어려운 구조에 놓였다. 이는 기업의 기술 독립성과 국제 관계의 종속성 간 충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로, 유럽 전체의 반도체 산업 전략에도 파장을 미치고 있다.
네덜란드 주도로 유럽 9개국이 모여 '반도체 연합(Semicon Coalition)'을 결성한 것도 이 같은 위기감에서 비롯됐다. 네덜란드 정부에 따르면 지난 3월 12일 브뤼셀에서 오스트리아, 벨기에, 핀란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 스페인 및 네덜란드 등 9개국이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반도체 연합 설립을 발표했다. 더크 벨자르트 네덜란드 경제부 장관의 제안에 따라 설립된 이 조직은 유럽의 반도체 산업 역량 강화를 위한 것으로, 유럽연합(EU) 내 반도체 생산 능력 확장과 반도체 신기술 개발 및 빠른 상업화 협력을 통해 밸류체인에서 유럽의 입지를 강화 및 확대하는 것이 목적이다.
반도체 연합과 별개로 ASML은 현재 미국 워싱턴, 유럽 브뤼셀, 네덜란드 헤이그에 로비팀도 확충하고 있다. 푸케 CEO는 “정치가 기술을 흔들게 놔둬서는 안 된다”며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보호주의를 강화하면 결과적으로 모든 기술 발전이 늦어진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