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화학 구조조정 ‘게걸음’, 수직계열화 난항 속 中 리스크 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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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화사·정유사 입장 제각각 사업 재편은커녕 입장차만 확인 업황 회복 때 주도권 뺏길 우려 가중

중국·중동발 공급과잉의 직격탄을 맞은 석유화학업계가 연말까지 구체적 사업재편 계획을 내기로 협약을 맺은 지 한 달이 다 돼가지만 뚜렷한 가닥을 잡지 못한 채 논의가 공전하고 있다. 안정적 원료 수급과 효율적 설비 운영을 위한 석화사와 정유사 간 수직 계열화 추진이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으나, 자율 협상 원칙 속 물밑 논의에서는 입장차만 확인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중국이 설비 폐쇄와 확장을 동시에 추진하는 '투트랙 전략'으로 한국 업계를 압박하고 있다. 세계 최대 석유화학 소비국이자 생산국인 중국이 향후 신기술에 기반한 공급 사이클 주도를 이어갈 경우 신규 투자 여력이 없는 국내 석화업계는 시장 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할 수밖에 없어 우려가 커진다.
기업 간 통폐합 논의 지지부진, 정부 압박 나서
25일 석유화학업계에 따르면 최근 정부는 복수의 석화 기업에 사업 구조조정 재편 계획 제출과 관련한 가이드라인을 전달했다. 구조조정안을 발표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기업 간의 통폐합 논의가 지지부진하자 정부가 압박에 나선 것이다. 정부 구조조정의 핵심 과제는 나프타분해시설(NCC) 설비 감축이다. 중국발 공급과잉과 경기 침체로 산업 전체가 장기 불황을 겪으면서 설비 감축이 불가피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앞서 정부는 지난달 20일 국내 전체 NCC 용량 1,470만 톤 중 18~25%에 해당하는 270만~370만 톤을 기업들이 자율 감축하는 방안을 발표한 바 있다. 이후 △여수 △대산 △울산 국내 3대 석화 산업단지에서는 정유사를 중심으로 석화사들의 통합 제안이 오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석화사가 원유를 다루는 정유사와 손을 잡으면 원재료인 나프타의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고, 설비 합리화를 통해 NCC 생산능력도 조절할 수 있어 구조조정 논의 초기부터 이러한 수직 계열화가 핵심 방안으로 떠올랐다.
현재 LG화학(여수)과 GS칼텍스가 NCC 통폐합을 협의하고 있고, 롯데케미칼과 여천NCC 간 설비 통합 논의도 이뤄지는 것으로 전해졌다. 대산에서도 HD현대오일뱅크와 롯데케미칼이, 울산에서는 SK지오센트릭과 대한유화가 통합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수직 계열화 외에도 석화사 간 수평적 통합을 위한 빅딜 논의도 꾸준하다.
하지만 서로 눈치 보기에 급급한 탓에 자발적인 구조조정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정유사 입장에서는 중국·중동의 범용 제품 과잉공급이 여전한 상황 속에서 NCC를 떠안는 리스크를 져야 하고, 화학 기업 입장에서는 '제값 받기'가 중요할 수밖에 없어서다. 또한 업체마다 사업 구조나 재정 상황에 따라 구조조정의 필요성이 다른 데다, 외국계 또는 합작사들은 해외 본사의 전략 결정이 중요해 협상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직접 찾은 울산 역시 뚜렷한 구조조정 모델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다.

“경쟁력이 우선”, 과감히 설비 폐쇄한 日
현재 한국이 진행하고 있는 구조조정 모델은 일본이 40여 년 전 시행했던 방식과 유사하다. 일본은 1980년대 초 제2차 오일쇼크 이후 본격적인 석화 구조조정에 나섰다. 이 기간 일본은 기업 간 통합형 설비 운영 모델로 에틸렌 생산능력 감산 등을 시도하며 경쟁력 강화를 추진했다. 2010년대 이후에는 구조조정과 특정 제품을 생산하는 한편, NCC 통폐합도 유도했다. 사업의 대형화와 전문화, 업체수를 축소해 내수 시장에서 수익성을 유지하겠다는 전략에서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당시 범용 제품인 '에틸렌 생산량 30% 감축'이라는 목표를 제시했고 이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일본의 에틸렌 생산 규모는 2010년 802만3,000톤에서 2015년 743만3,000톤으로, 2020년에는 681만7,000톤으로 더 줄였으며, 2028년까지 430만 톤으로 36% 줄이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이라는 점에선 비슷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일본에서는 정부의 지원책이 병행됐다는 점이다. 일본 정부는 감축 목표를 제시하는 동시에 확실한 지원책을 발표하며 기업들이 과감한 구조조정을 할 수 있는 배경을 마련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특정산업구조개선임시조치법이다. 일본 정부는 이를 통해 생산 집중, 공동 투자, 공동 판매회사 설립, 과잉 설비 처리 등을 추진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독과점 행위는 예외로 인정했다. 이 밖에도 합병, 분할, 설비 축소 등 사업 재편에 대해 세제 공제와 과세 이연을 지원했고, 구조조정 과정에서 펀드를 통한 보조금 지급 등 금융 지원을 제공했다. 나아가 생산 설비의 효율화와 통합을 위해 사용하는 전기요금에는 감면 혜택도 부여했다.
일본의 석화 산업 재건은 구조조정에서 멈추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기업들이 기존 범용제품 감축을 넘어 제품 고부가가치화를 위해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산업의 성장 동력 확보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9년 산업활력법과 2014년 산업경쟁력강화법을 제정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를 통해 회사마다 특정 제품 생산에 주력할 수 있도록 조정하며 기업의 선제적인 사업재편을 지원했다.
특히 일본은 독점금지법 관련 조항인 공정거래법 40조 2항을 개정해 정부가 탈탄소화, 산업 재편 등을 명분으로 기업 간 통합, 설비 공동 폐기 등 경쟁 제한 행위에 대해 예외를 허용하기도 했다. 일본 주요 석화기업은 정부 지원을 바탕으로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R&D) 투자 비율은 2021년 기준 3.5%로, 한국(1%)이나 대만(1.3%)을 압도하는 것도 정부의 지원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신에쓰화학은 신사업인 반도체 소재사업 매출 비중을 단숨에 31%로 끌어올리며 세계 1위 실리콘 웨이퍼 기업으로 재탄생했다. 일본 석화 업체가 중국 업체와의 경쟁이 덜한 고부가가치 생산업체로 변신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中, 과잉공급 와중 대거 증설로 韓 압박
하지만 일본과 달리 한국 정부는 '선(先) 자구 노력, 후(後) 정부 지원'의 기본 방침을 분명히 했다. 물론 향후 업계에서 제출하는 사업재편계획에 대한 타당성 및 기업들의 자구노력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후 이에 필요한 지원패키지를 마련해 뒷받침할 예정이지만, 당장은 정부 지원에 대한 유인이 전혀 없는 상황이다.
일본처럼 고부가 시장으로의 빠른 전환도 쉽지 않다. 일부 기업들이 고부가 시장 중심으로 사업 전략을 재편하고, 바이오나 전지소재 등 신사업도 확장하고 있지만 산업 전반의 구조 전환에는 아직까지 뚜렷한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모양새다. 특히 일본이 공급과잉을 피하기 위해 범용 제품 감산과 고부가 전환을 병행한 것과 비교하면 국내 업계의 전환 속도는 여전히 더디다는 게 업계의 지배적인 평가다.
이런 와중에 노후 석화 설비 폐쇄를 핵심으로 한 구조조정을 예고한 중국이 대규모 신규 설비 확장을 동시에 추진하는 투트랙 전략을 펼칠 예정이라 한국 석화업계의 고민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중국 최대 정유사인 중국석유화공그룹(시노펙)이 신장웨이우얼자치구에서 펼치고 있는 타허(塔河)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시노펙은 해당 설비의 기존 정유 능력을 연산 500만 톤에서 850만 톤으로 확장하고 에틸렌(연산 80만 톤), 방향족 제품(연산 80만 톤) 생산량 역시 늘릴 방침을 세우며 본격 준비에 나서고 있다. 특히 친환경 소재로 주목받는 수소분해 설비는 연산 240만 톤 규모로 건설한다. 시노펙은 이곳에서 총 16개 신규 설비를 2029년까지 완공해 2030년부터 양산에 돌입할 계획이다.
중국 국영 3대 정유업체 중 하나인 페트로차이나 역시 랴오닝성 다롄의 노후 정유소를 폐쇄하는 동시에 연간 140만 톤 규모의 에틸렌 설비와 폴리프로필렌 등 화학제품 단지를 신설한다. 또 다른 국영 업체인 중국해양석유총공사는 글로벌 정유사 쉘과 함께 광둥성 지역에 연산 160만 톤 규모의 에틸렌 크래킹 시설, 32만 톤 규모의 폴리카보네이트 등 특수 화학제품 설비를 구축할 방침이다.
이 같은 중국의 투트랙 전략은 당장 눈앞의 보릿고개를 넘어가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국내 석화업계에 큰 악재다. 연말까지 에틸렌 생산 설비·시설 감축을 목표로 구조조정을 진행 중인 국내 석화업계는 신규 투자는 고사하고 구조조정을 위한 자금 여력조차 부족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설비 정리를 통해 기초 석화 제품 생산량 감축을 유도할 경우 당장은 시장 안정화를 가져올 수 있겠지만 경기 회복 국면에서는 오히려 중국이 공급 경쟁력을 선점할 수 있어 국내 기업들의 회생 전략이 사실상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