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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 조각투자 수요 기반 취약
‘현금화 어려운 자산’ 인식 고착화
당국, 시장 진흥보다 통제에 방점

미술품 조각투자 시장이 반복된 청약 미달과 제도적 한계 속에 사실상 멈춰 선 모습이다. 주요 플랫폼들이 야심 차게 추진한 공모들이 일제히 저조한 성적을 거두는 가운데, 정부의 토큰증권(STO) 제도화도 지연되면서 불확실성을 더욱 키우고 있다. 일반투자자 투자 한도 제한, 부재한 세제 혜택, 낮은 유동성 등 구조적 문제들이 속속 수면 위로 떠오르며 시장 자체에 대한 신뢰 또한 무너지는 양상이다.
투자사들 의욕에도 시장 반응 냉담
4일 투자업계에 따르면 올해 들어 국내에서 진행된 미술품 조각투자 공모는 모두 흥행에 실패하며 청약 미달 사태를 겪었다. 열매컴퍼니가 들고나온 ‘호박’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일본 출신의 세계적 설치미술가 쿠사마 야요이가 제작한 동명의 미술품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열매컴퍼니 4-1호 투자계약증권은 총 7,400주 모집에서 3,328주의 청약 미달이 발생했다. 여기에 공동사업 운영자 등에게 우선 배정되는 지분이 10%라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청약률은 50% 아래로 떨어진다.
미술품 조각투자 시장에 첫발을 내디딘 예스24의 자회사 아티피오도 첫 공모에서 실패를 맛봤다. 아티피오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2021년 작 아이패드 드로잉 작품 ‘30th May 2021, From the Studio’를 기초자산으로 지난 2월 1호 투자계약증권 청약을 진행했다. 발행 총액 7억8,000만원 중 90%인 7억200만원(7만200주)이 그 대상이었으며, 결과는 39.34%의 청약률에 그쳤다. 이 같은 청약 미달로 아티피오는 전체 물량의 64.59%를 떠안았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5억380만원(5만380주)에 달하는 규모다.
이처럼 청약이 부진한 데는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먼저 투자자 입장에서 미술품은 본질적으로 수익 실현이 어려운 자산에 속한다. 증권처럼 가격 변동이 빠르게 반영되지 않을뿐더러, 실물 자산이라는 점에서 유동성 또한 떨어지기 때문이다. 나아가 투자금 회수 시점이 명확하지 않고, 작품 가치 산정에도 불확실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특히 실제 작품을 볼 수 없는 환경에서 소유권의 일부만 확보하는 투자 모델은 매력적이지 못하다는 게 투자자들의 평가다.

제도 미비와 규제가 발목
제도적 기반의 부재와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 또한 미술품 조각투자 시장의 활성화를 가로막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특히 조각투자의 핵심 구조인 토큰증권(STO) 제도는 여전히 뚜렷한 로드맵조차 없는 상태다. 금융위원회는 수년째 STO 활성화를 언급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추진 전략이나 인프라 구축은 미진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조각투자 플랫폼들은 법적 불확실성 속에서 사업을 영위 중이며, 투자자들 역시 안심하고 자금을 투입할 수 없는 구조가 됐다.
현행 규제 환경 또한 조각투자에 대한 투자자들의 의지를 꺾는 원인 중 하나다. 현재 조각투자 상품의 일반청약자 1인당 청약 한도는 3,000만원으로 이를 초과하는 수량의 증권은 배정받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일반 투자자보다는 전문 투자자 위주의 접근이 주를 이룬다. 투자 위험에 대한 보호 장치로 도입된 제한이 도리어 시장 활성화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된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제도들이 미술품이나 부동산 등 실물 자산을 디지털화하더라도 이를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는 시장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조각투자 상품의 핵심은 결국 거래 가능성과 환금성인데, 지금과 같이 2차 거래소나 유동화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투자자들이 ‘들어갈 수는 있어도 나올 수는 없는’ 구조에 갇히게 된다는 지적이다. 한때 신산업 주목받았던 조각투자 모델이 제도화되지 못한 채 방치되면서 투자자 보호와 사업자 지원, 시장 성장 모두 놓치게 된 배경이다.
증권사도 버거운 시장, 뚫지 못한 제도 장벽
일부 증권사가 새로운 수익 모델로 조각투자 시장을 공략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일례로 지난해 3월 신한투자증권과 SK증권, 블록체인 기반 개발사 블록체인글로벌 등이 출범한 ‘프로젝트 펄스’의 사례를 꼽을 수 있다. 프로젝트 펄스는 조각투자와 혁신금융서비스 사업자 대상으로 블록체인 금융 인프라 시범 사업을 운영하면서 STO 발행과 유통 인프라, 컨설팅 등을 제공한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비슷한 시기 교보증권은 부동산 조각투자 플랫폼 ‘소유’ 운영사인 루센트블록과 업무협약을 체결했으며, 하나증권은 프린트베이커리와 루센트블록, 피나클, 오아시스 비즈니스 등과 조각투자 서비스 관련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한국투자증권도 아트 플랫폼 ‘아투’ 운영사 아비투스 어소시에이트, 한우 조각투자 플랫폼 ‘뱅카우’를 운영하는 스탁키퍼와 협약을 맺었다.
이처럼 증권사들이 STO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거래 수수료 수익 등 토큰증권의 유통을 새로운 먹거리 사업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에 따르면 국내 STO 시장은 올해 34조원에서 오는 2030년 367조원으로 성장할 전망이다. 특히 미술품 조각투자는 기존 금융 자산과는 차별화된 프리미엄 대체 투자로 주목받으며 젊은 투자자층 확보와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 수단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반복된 청약 미달과 구조적 난관 앞에서 이러한 긍정적 전망은 시장 확장의 동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KB증권, 미래에셋증권, SK증권, 신한투자증권 등 국내 증권사 4곳과 제휴 중인 서울옥션블루의 미술품 조각투자 서비스 ‘소투’는 지난해 말 앤디 워홀의 ‘달러 사인’을 기초자산으로하는 8호 조각투자 공모를 진행했는데, 청약률이 86.9%를 기록하며 미달됐다. 이마저도 거래금 납부 직전 투자자들이 대거 발을 빼면서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이 또한 제도적 장벽의 영향으로 해석할 수 있다. 조각투자는 본질적으로 토큰화된 실물 자산을 기반으로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법적·기술적 인프라가 받쳐주지 않으면서 상품 자체의 신뢰도가 낮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은 조각투자 플랫폼을 증권성 자산 거래소로 간주하면서도 정작 관련 인가와 관리 체계는 별도로 마련하지 않아 사업자와 투자자 모두 애매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게 시장 참여자들의 일관된 목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