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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에 밀리며 충격의 무실적
내부에선 이미 “자신감 과잉” 지적
선진 기술 포장 한계 여실히 드러나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이 미 해군 선박 유지·보수·정비(MRO) 사업 첫 수주전에서 나란히 탈락했다. 막대한 투자를 바탕으로 기술력과 시스템을 내세웠으나, 가격과 납기 등 미국 조달 시장 특유의 평가 기준을 넘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한화오션은 이와 함께 태국 해군 수주전에서도 현지화 전략을 강조하며 공세 중이지만, 뚜렷한 실적을 확보하지 못한 채 계약이 지연되는 실정이다. 이 같은 연이은 수주 실패는 한국 조선업계 전략의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신호로 읽힌다.
美 해군 MRO 시장, 연간 70억 달러 규모
26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최근 미국 해상수송사령부(MSC)는 7함대 소속 군수지원함 1척에 대한 MRO 입찰 결과를 통보했다. 최종 낙찰자로는 싱가포르 업체가 선정됐고, 한화오션과 HD현대중공업 등 우리 기업들은 고배를 마셨다. 미국 조선업 재건의 핵심 파트너로 언급될 만큼 주목받은 두 회사는 일찌감치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공급망과 인프라를 갖추는 등 진출 채비를 마쳤지만, 첫 시험 무대에서 아무런 성과 없이 빈손으로 돌아서게 됐다.
이에 단일 선박 정비 수준의 소규모 사업에서 우리 업체들이 경쟁사에 밀린 배경에도 이목이 쏠렸다. 업계는 이번 입찰이 완전 경쟁 체제(Open Competition)로 진행돼 가격 중심의 평가가 이뤄졌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이번 입찰은 조건 등을 두지 않고 누구나 참여 가능한 구조였다”며 “가격 중심으로 경쟁했기 때문에 기술력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한화오션의 경우, 예상보다 사업성이 낮다고 판단해 중도에 입찰 참여를 철회하기도 했다.
다만 이번 계약은 향후 수조 원대에 달하는 후속 정비 프로젝트와 직결되는 첫 수주라는 점에서 그 파장이 상당할 전망이다. 미 회계감사원(GAO)에 의하면 미 해군은 전함 MRO 사업에 연간 60억∼74억 달러(약 8조8,000억∼10조8,000억원)를 지출하고 있으며, 이 시장을 겨냥해 HD현대와 한화오션은 미국 방산 네트워크와의 협력 강화, 전담 조직 신설, 통합 유지보수 시스템 구축 등 공격적인 행보를 이어 왔다. 정부 역시 ‘K-조선의 글로벌 확장’이라는 메시지를 강조하며 지원사격에 나섰지만, 결국 두 회사 모두 실적 없이 다시 출발선에 서게 됐다는 평가다.
이 때문에 시장에서는 이번 결과가 단순한 수주 실패를 넘어 한국 조선업계의 대외 전략에 구조적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는 평가 또한 나온다. 기술력을 앞세워 새로운 시장을 열겠다는 방향성은 옳지만, 실질적으로 수주를 따내기 위해 요구되는 현지 신뢰와 가격 대응력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전략 자체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것이란 지적이다. 글로벌 무대에서 경쟁력을 입증하기 위해선 단순한 투자나 선언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현장 중심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가격·운영 효율 중시하는 미국 시장
업계에서도 HD현대와 한화오션의 미국 해군 MRO 수주전 실패는 어느 정도 예견됐던 결과라는 반응이 주를 이룬다. 미국 군수 조달 시스템은 기술 스펙보다 가격과 납기 이행, 운영 효율성을 중시하는 구조인데, 한국 기업들은 이를 간과했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GAO는 지난해 보고서를 통해 “MRO 입찰의 핵심 평가 요소는 가격 경쟁력과 이행 실적”이라고 명시한 바 있다. 애초 기술로 설득할 수 있다는 기대가 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된 배경이다.
한화오션은 2023년 5월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한 뒤 2조원 상당의 대규모 유상증자를 통해 글로벌 방산 진출 기반을 마련했다. 이듬해 7월에는 미 해군과 함정정비협약(MSRA)을 체결하며 본격적인 미국 조달 시장 진출을 선언했고, 이후 8월과 11월에는 각각 윌리쉬라호와 유콘호 정비사업을 수주해 창정비, 정기 수리 등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고압세척로봇·역설계 기술 등을 통해 추가 결함을 조기에 발견하는 성과도 거뒀다. 그러나 추가적인 MRO 수주에는 실패하며 경험을 실적으로 확장시키지 못했다.
HD현대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기술 기반 해양플랜트 및 조선 역량을 강조했지만, MRO 사업은 선박 건조와는 완전히 다른 운영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시장인 탓이다. 나아가 파일럿 프로젝트나 시험 정비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본사업 입찰에 나선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미국 조달 시장은 사전 검증을 중시하는 구조인데, HD현대는 가시적인 미국 내 성과 없이 비전과 기술력만으로 입찰에 나섰고, 이는 수주 참패로 이어졌다.
결국 두 기업 모두 기술 역량에 대한 자신감은 충분했지만, 시장 구조에 대한 현실 인식이 부족했다는 평가가 가능해진다. 해군을 포함한 미국의 연방 조달 시스템은 전통적으로 가격과 납기 이행력, 과거 실적을 핵심 평가 요소로 삼으며, 기술력 자체보다는 실제 수행 경험과 이행 신뢰도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이번 수주전은 ‘최초 정식 발주’로서 시범 사업을 통한 검증보다는 가격 조건과 납품 이력에 기초한 평가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한국 조선업체들에는 상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이었다. 기술적 역량과 시스템 구축을 강조한 전략이 반드시 낙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현실이 이번 결과를 통해 다시 확인된 셈이다.

비슷한 전략 반복보단 전환점 마련 시급
미국 해군 MRO 수주전 실패 이후에도 한화오션은 글로벌 방산 시장 확대를 위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태국 해군이 추진 중인 2차 호위함 사업 수주를 위해 ‘현지화·기술이전’ 전략을 전면에 내세우며 전방위 영업전에 나섰다. 해당 전략은 과거 수출국들과의 협력 과정에서 유효했던 방식으로, 태국 측 요청에 따라 창정비와 기술이전 로드맵, 유지보수 설비 구축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여전히 실질적 수주 결과가 나오지 않은 만큼 과거 방식의 반복이 유효할지는 미지수다. 한화오션은 앞서 2020년 태국 해군에 첫 호위함을 수출한 전례가 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추가 수주 가능성이 크다는 낙관적 전망도 존재했지만, 지금까지 계약 체결이 공식화된 바는 없다. 태국 해군은 여전히 다양한 국가들과의 입찰 경쟁을 유도하고 있으며, 한국은 높은 기술력과 운영 안정성을 앞세웠음에도 가격 경쟁과 납기 조건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지는 못한 상태다. 나아가 협상 초기부터 유력 후보로 거론됐던 만큼 지연이 길어질수록 부담도 커지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한국 조선업계가 보유한 전략의 유효성을 근본적으로 재점검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산업연구원은 ‘조선업 가치사슬 종합경쟁력과 새로운 한국형 해양 전략 방향 보고서를 통해 “지금까지와 같이 기술 중심, 비전 중심의 전략만으로는 입찰 현실을 돌파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진단하며 “각국 조달 시장별 평가 기준과 운용 관행에 정밀하게 대응할 수 있는 전략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선진 기술과 포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현실을 여실히 드러내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