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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급 CDO에 첫 외국인 영입
내달 행사에서 중장기 전략 발표 전망
핵심 소비층 변화, 디자인 중요도↑

삼성전자가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산업 디자이너 마우로 포르치니(Mauro Porcini)를 디자인 총괄 사장에 임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가 1969년 창립 이래 외국인 디자이너를 주요 임원으로 임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디자인 혁신에 속도를 내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감성’ 디자인 전문가 영입
29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최근 펩시코 최고디자인책임자(Chief Design Officer, CDO) 출신의 포르치니를 디바이스경험(DX) 부문 사장급 CDO로 영입했다. 3M과 펩시코 등을 거친 포르치니는 브랜드와 제품을 유기적으로 통합 디자인하는 프로젝트를 주도해 왔으며, 2012년에는 포춘지가 선정한 ‘40세 이하 리더 40인’에 디자이너 가운데 유일하게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업계는 삼성전자가 이번 포르치니 영입을 계기로 본격 ‘디자인 경영’에 속도를 낼 것으로 관측했다. 앞서 삼성전자는 지난해 4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디자인위크 2024’에 참석해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새롭게 정립한 디자인 철학 ‘본질과 혁신, 조화’를 공개한 바 있다. 제품 본연의 기능과 쓰임에 집중하는 ‘본질’, 고객의 삶에 의미 있는 변화를 줄 수 있는 ‘혁신’, 제품과 서비스는 물론 사회적인 부분까지 아우르는 ‘조화’의 디자인을 구현하겠다는 포부다.
삼성전자가 이 같은 디자인 철학을 제시한 밀라노는 2005년 4월 고(故) 이건희 선대 회장의 ‘디자인 선언’이 있던 곳이다. 당시 이 선대 회장은 밀라노 디자인위크를 찾아 “애니콜은 일류지만, 삼성의 (평균적인) 디자인 경쟁력은 1.5류(流)”라고 자평하며 삼성전자의 디자인 실력이 아직 미흡하다고 언급했다.
당시 밀라노 현지에서 주요 계열사 사장단을 소집해 디자인 전략회의를 연 이 선대 회장은 “제품이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순간은 평균 0.6초인데 이 짧은 순간에 고객의 발길을 붙잡지 못하면 승리할 수 없다”며 “삼성의 차세대 핵심 전략은 바로 디자인”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전 계열사의 디자인 역량을 세계적인 명품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지시했다.
새로운 디자인 수장의 임무는 중장기 전략 구상이다. 포르치니는 가장 먼저 삼성전자 디자인의 현재 수준을 냉정하게 진단하고, 새로운 청사진을 제시할 전망이다. 그는 지금까지 활동하며 줄곧 ‘감성’을 강조해 왔다. 디자인은 단순히 물건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사람과 브랜드, 기술을 연결하는 감성적 언어라는 게 포르치니의 철학이다. 업계는 당장 내달 예정된 밀라노 디자인위크에서 삼성전자가 차세대 디자인 로드맵과 글로벌 브랜드 전략을 공개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기술·디자인으로 경쟁 업체 압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또한 선대 회장 별세 후 줄곧 디자인 경영을 강조해 왔다. 일례로 그는 2020년 11월 서울 우면동 서울 연구개발(R&D) 캠퍼스에서 디자인 전략회의를 열고 “다시 한번 혁명을 위해 디자인에 혼을 담아내자”고 힘줘 말했다. 당시 회의에는 주요 사업 부문 핵심 경영진이 모두 자리해 있었다.
이 같은 이 회장의 발언을 두고 삼성전자 내부에서는 ‘초격차 전략의 확대’라는 시각이 주를 이뤘다. 기술뿐 아니라 디자인에서도 경쟁 업체를 압도하는 수준으로 도약하겠다는 의지가 담겼다는 분석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아우르는 통합 디자인 역량이 중요해졌다는 게 이 회장의 판단”이라고 풀이했다.
업계에선 이 회장이 디자인을 강조한 배경을 ‘좋은 디자인’의 개념이 빠르게 바뀌고 있기 때문으로 해석했다. 기술의 발달로 여러 기기가 하나로 연결되고, 제품과 서비스의 융·복합화 속도도 빠른 만큼 디자인의 편의성과 통일성이 중요해졌다는 진단이다. 업계 관계자는 “스마트폰은 이미 많은 소비자가 외관보다 사용자 환경(UI) 디자인을 보고 제품을 고른다”고 설명했다.
지역 특화 혁신 디자인에 과감한 투자
이 선대 회장이 주창한 ‘사용자에서 출발해 내일을 담아내는 디자인’ 철학도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쳤다. 삼성전자는 2019년 ‘대담하라. 영혼과 교감하라(Be Bold. Resonate with Soul)’라는 문구를 새로운 디자인 철학으로 내걸었다. 개인적 감성을 중시하는 2·30대 청년층이 핵심 구매층으로 부상한 만큼 혁신적인 기술만으로는 이들을 충분히 만족시키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삼성전자 고위 관계자는 “혁신 기술은 삼성전자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지만, 이제는 단순히 높은 기술력만으로 젊은 세대에 어필하기 어렵다”면서 “기존의 정중하고 차가운 아저씨 느낌의 첨단, 또는 기술기업 이미지보다는 20대 초반 여성의 감성적 이미지를 표현해 설득력을 높여가는 기업이 되고자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해외 주요 지역에 디자인 거점을 확대한 것도 이와 같은 취지다. 삼성전자는 서울에 위치한 삼성디자인경영센터를 중심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영국 런던, 중국 베이징, 일본 도쿄 등 전 세계 7곳에 디자인 거점을 두고 각 지역에 특화된 혁신 디자인을 개발 중이다. 사물인터넷(IoT)과 AI 등 신기술을 기반으로 한 선행 디자인 기획, 사업부 간 시너지 제고 등이 모두 이들 연구소에서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