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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수급 불안·고비용 문제 대두
미국 전역 데이터센터 과부하 신음
동남아시아 빅테크 유치 경쟁 본격화

미국 내 탈원전 기조와 전력 인프라 부담이 겹치면서 전기요금이 급등하고, 그 여파로 빅테크 기업들의 데이터센터 운영 부담 또한 커지는 모습이다. 이 같은 흐름에 다수의 기업은 전력 비용이 상대적으로 낮고 규제가 유연한 동남아시아로의 이전을 서두르고 나섰다. 인공지능(AI)의 확산으로 전력 수요가 폭증하는 시점에서 미국 지역사회는 에너지 다소비형 산업을 꺼리는 반면, 동남아 각국은 오히려 이를 국가 성장동력으로 삼고 있어 글로벌 인프라 재편 또한 가속하는 형국이다.
탈원전 정책이 에너지 인프라 경쟁력 약화 초래
14일(이하 현지시각) 에너지 업계에 따르면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전기요금 폭등과 함께 대규모 정전 사태가 반복되며 주민들의 불만이 쇄도하고 있다. 미국 에너지정보국(EIA)에 의하면 지난해 2분기 캘리포니아의 평균 가정용 전기요금은 킬로와트시(kWh)당 33.78센트로 미국 50개 주 전체 평균(16.55센트)과 비교해 두 배가 넘는다. 해당 지역은 미국에서 가장 많은 전력을 필요로 하는 지역으로 꼽히지만, 탈원전 기조가 이어지면서 전력 수급의 안정성이 무너졌단 분석이다.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2010년대 후반부터 단계적으로 원전을 폐쇄하고 재생에너지 의존도를 높여 왔다. 2010년 캘리포니아 전체 전력 공급원의 60%를 차지하던 화력 발전 비중은 2022년 39%로 떨어졌으며, 원자력 발전의 비중도 같은 기간 18%에서 11%로 낮아졌다. 반면 16%였던 신재생에너지 비중은 같은 기간 39%까지 높아졌다. 그러는 동안 전력망 안정성은 도리어 저해됐다. 다수의 전력회사가 신재생에너지 발전에 막대한 금액을 쏟아부으면서도 노후 전력선 보수 작업 등은 뒷전으로 미룬 탓이다.
제때 보수되지 않은 낡은 전력선들은 고장을 일으키며 크고 작은 정전 사태를 낳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태양광과 풍력 발전은 날씨에 따라 전력 생산량이 달라지기 때문에 전력망의 안정성이 떨어질 수 있다”며 “보수 작업이 우선순위에서 밀린 노후 장비는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2021년 캘리포니아 북부 뷰트카운티에서 발생한 화재는 노후화된 전력선에서 시작돼 서울 전체 면적의 7배에 달하는 4,040㎢를 태운 뒤 진압됐다. 이 과정에서 1만 명이 넘는 주민이 대피하기도 했다.
이 같은 전력 불안정과 비용 상승은 대규모 에너지 수요처인 데이터센터 운영에도 큰 부담으로 작용하는 양상이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캘리포니아 서부 지역에서의 신규 데이터센터 건설을 중단했으며, 구글 또한 인근 지역의 데이터센터를 해외로 이전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전력 공급이 예측 불가능하고 정전 위험까지 동반하게 되면, 데이터센터 운영 자체가 리스크로 전환된다는 게 이들 기업의 판단이다. 결국 에너지 리스크는 단순한 비용 문제를 넘어 기술 기업의 장기 투자 판단에도 직접적 영향을 주는 구조적 변수로 주목받는 모습이다.

에너지 낭비·탄소배출 논란에 마찰 심화
캘리포니아를 벗어난 데이터센터들이 미국 전역으로 분산되면서 기존에 일부 지역에 한정됐던 에너지 문제는 점차 미국 전반의 이슈로 확대되고 있다. 데이터센터는 본질적으로 막대한 전력을 요구하는 시설이며, 냉각에는 방대한 양의 물이 소비된다. 리서치그룹 Dgtl 인프라는 지난 2023년 미국 데이터센터 전체의 물 소비량이 750억 갤런(2,840억 리터)을 넘는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이는 연간 가정용 수자원 사용량에 육박하는 규모로, 지역 사회와의 갈등을 촉발하는 새로운 환경 리스크로 부상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전력·수자원 소비가 특정 지역에 집중되면, 해당 지역 전력망이나 수도 시스템에 미치는 영향이 단기간 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설 것이라고 우려했다. 데이터센터 건설을 기점으로 인근 지역의 정전 빈도가 늘고 수도 공급 불안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등 주민들 사이에서 ‘빅테크의 에너지 독식’에 대한 반감 또한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밖에 없단 지적이다.
이 같은 배경에서 데이터센터 유치는 더 이상 경제 유발 효과만을 고려해 반기는 대상이 아니다. 전력 부족 우려와 탄소배출 감축 기조가 맞물리며 에너지 다소비형 산업 유치에 대한 정치적 부담이 커진 것이다. 한때는 첨단산업의 상징이던 데이터센터가 이제는 ‘기피 산업’으로 낙인찍히는 분위기마저 감지된다. 이런 변화는 미국 내 빅테크 기업들의 투자 전략에도 적잖은 영향을 주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해외 이전을 가속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는 모습이다.
규제 리스크는 낮추고, 비용 효율은 높이고
미국 전역에서 데이터센터 운영에 따른 에너지 비용과 주민 반발이 갈수록 커지면서 빅테크 기업의 해외 이전도 늘어나는 추세다. 최근 주목받는 지역은 전력 단가가 저렴하고 인프라 확장이 유연한 동남아시아다. 미국 시장조사 기관 아리츠톤은 2023년 동남아 국가들이 데이터센터와 관련해 총 102억3,000만 달러(약 14조2,000억원)규모의 투자를 유치한 것으로 추정했다. 연평균 약 9.6%씩 늘어나는 동남아 데이터센터 투자 규모가 오는 2029년에는 177억 달러(약 24조4,000억원)에 이를 것이란 관측이다.
동남아 국가들도 에너지 다변화와 탄소중립 기조에 맞춘 친환경 데이터센터 허브 구축을 경쟁적으로 추진 중이다. 싱가포르의 경우, 한때 데이터센터 허가를 중단했다가 최근 ‘그린 인증’을 받은 기업에 허가를 재개하는 방식으로 전환했으며,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도 재생에너지 기반 전력 사용을 조건으로 빅테크 기업의 투자를 적극 유치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 변화는 기존 미국 및 유럽 시장 대비 규제 리스크는 낮고, 비용 효율은 높은 환경을 제공한다.
이처럼 동남아 각국이 데이터 인프라 유치를 ‘국가 성장 동력’으로 설정하면서 기업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사티아 나델라 MS 최고경영자는 지난해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향후 4년간 17억 달러(약 2조4,000억원)를 투자해 데이터센터 구축 등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으며, 구글과 엔비디아 역시 각각 20억 달러(약 2조8,000억원), 43억 달러(약 5조9,000억원)을 들여 말레이시아에 데이터센터를 건립할 계획이라고 알렸다.
이는 에너지 비용과 환경 규제가 점점 더 중대해지는 글로벌 환경 속에서 동남아가 더 이상 대체 투자처에 머무르지 않고 주력지로 부상했음을 의미한다. 단순한 비용 절감을 넘어 정책 안정성과 유연한 규제, 친환경 기반의 에너지 전략까지 맞물리며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에게 실질적인 ‘기회의 땅’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 내 갈등과 리스크가 여전히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만큼 빅테크의 동남아행은 당분간 더욱 가속할 것으로 보이며, 이는 곧 글로벌 데이터센터 산업의 지형도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만들어낼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