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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검토 끝에 日·中 열연강판 반덤핑 조사 착수 엔저 흐름 이어지며 저가 제품으로 '밀어내기' 공세 美 트럼프 행정부 특별 관세까지 韓 철강업계 타격

산업통상자원부가 일본·중국산 열연강판에 대한 반(反)덤핑 조사에 들어간다. 일본과 중국 철강업체들이 내수 시장 침체로 쌓인 재고 물량을 15% 싼값에 한국 시장으로 밀어내면서 국내 기업이 피해를 봤을 가능성을 점검하기 위해서다. 핵심 철강재인 열연강판에 덤핑 판정이 내려지면 일·중의 저가 공세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25% 관세 폭탄으로 이중고를 겪고 있는 국내 철강업체에 숨통이 트일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각에서는 반덤핑 조사 착수 자체가 상대국에는 규제로 받아들여져 무역 갈등의 불씨가 될 것이란 우려도 제기된다.
산업부, 현대제철 제소에 반덤핑 조사 나서기로 결정
21일 철강업계에 따르면 산업부 무역위원회는 현대제철이 제기한 '일본·중국산 열연강판 반덤핑' 사안에 대해 조사에 착수하기로 내부 방침을 정했다.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정부 공고는 이달 전자 관보에 게재될 예정이다. 반덤핑 조사는 낮은 가격으로 수입되는 외국 물품에 관세를 부과하는 규제 조치로, 무역위 조사에서 덤핑이 확인되면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에 따라 무관세 혜택을 받아 온 일본·중국산 열연강판에 관세가 부과돼 국내산과의 가격 차가 줄어들게 된다. 통상 조사 개시 후 최종 결론이 날 때까지 1년 이상 소요되지만, 큰 피해가 예상되는 사안에 대해서는 본조사 전에 예비조사 결과를 토대로 즉시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
일본과 중국 철강업체가 이른바 '밀어내기 수출'을 본격화한 것은 2년 전부터다. 이들 기업은 자국 내 건설·제조업 수요 감소로 재고가 쌓이자 한국 시장에 저가로 열연강판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 업체가 저가 공세를 펼칠 수 있는 배경에는 '엔저(低)' 흐름이 자리 잡고 있다.
이미 내수 부진으로 어려움에 직면한 국내 철강업계가 중국에 이어 일본까지 저가 공세에 가세하자, 현대제철은 지난해 12월 정부에 일본·중국 업체의 열연강판 수출에 관한 반덤핑 조사를 공식 요청했다. 이에 정부는 일본, 중국 등과의 통상 마찰 가능성을 감수하면서도 국내 철강 생태계 붕괴를 우려해 두 나라 철강업체 대상으로 반덤핑 조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업계에 따르면 19일 기준 일본산과 중국산 열연강판 가격은 톤(t)당 71만4,000원 수준으로 국산(81만5,000원)보다 12.4% 저렴하게 팔리고 있다. 여기에 물류비 등을 더하면 실제 가격은 5~10%가량 차이가 난다. 한동안 국내산과 일본·중국산과의 가격 격차가 20%에 달했지만, 일본·중국 업체들이 한국 정부의 반덤핑 조사 개시를 앞두고 판매 가격을 소폭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국내에서 소비한 열연강판 약 611만 톤 가운데 외국산의 비중은 60.9%(약 372만 톤)로 금액 기준으로는 3조원에 달한다. 이 가운데 일본산과 중국산의 비중은 각각 52.2%, 44.1%로 집계됐다.
기초 소재 열연강판 무너지면 韓 철강 근간 흔들려
하지만 정부의 반덤핑 조사를 두고 국내 철강업계의 반응은 엇갈리고 있다. 현대제철은 중국·일본의 저가 공세에 대해 무역위에 제소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포스코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포스코가 주요 거래처인 일본 시장과의 관계를 고려해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현대제철은 현대차·기아라는 거대 고객사를 확보해 내수 시장에 집중할 수 있지만, 포스코는 수출 물량의 20%를 일본 시장에 의존하고 있어 일본산에 대한 반덤핑 규제에 직접적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열연강판은 쇳물로 만든 평평한 판재인 반제품(슬라브)을 높은 온도로 가열해 3㎜ 두께로 가공한 강판을 말한다. 냉연강판을 비롯해 도금강판, 컬러강판, 강관 등 대다수 판재류의 기초 철강재로 쓰인다. 국내 시장에서는 포스코와 현대제철 등 고로사가 열연강판을 생산하고, 동국제강· 세아제강 등 후공정 업체가 고로사로부터 열연강판을 제공받아 제품으로 가공해 팔고 있다. 업계에서는 포스코와 현대제철이 연간 생산하는 열연강판 물량을 약 3,000톤으로 추정하는데 이 가운데 70% 이상을 포스코와 현대제철이 자체 사용하고 나머지 물량은 후공정 업체에 공급한다.
이 같은 구조 탓에 후공정 업체의 반발도 반덤핑 조사의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기초 소재인 열연강판에 관세가 부과되면 원재료 가격이 상승해 후공정 업체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대제철의 제소가 기초 소재에 대한 관세 부과를 지양하는 세계적 흐름과 동떨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례로 유럽연합(EU)은 2011년 컬러강판, 2021년 도금강판에 관세를 우선 부과한 뒤 지난해 6월에서야 열연강판에 대한 반덤핑 규제를 시작했다. 기초 소재부터 관세를 부과하면 가공된 수출 제품의 가격 상승으로 이어져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한 것이다.
반면 한국 철강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는 일본·중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 부과가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특히 열연강판 같은 기초 판재류는 특수강에 쓰이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술 격차가 거의 없어 가격이 판매를 좌우한다. 이렇다 보니 업계에서는 철강 제품이 해외 무대에서 한국과 일본이 치열하게 경합하는 품목인 만큼, 해외 의존도가 확대되면 결국 국내 철강 산업의 자립도를 낮추는 결과를 초래해 한국 철강 산업의 근간이 흔들릴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해당 사안을 제소한 현대제철 측도 "해외 저가 철강재의 유입으로 국내 산업이 무너지기 직전"이라며 "경제 블록화가 심화하는 상황에서 무너진 국내 철강시장의 정상화가 절실하다"고 호소했다.

트럼프 정부 '25% 관세' 부과에는 현지 진출로 대응
미국 정부가 자국의 철강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부과한 관세 폭탄도 악재다. 앞서 트럼프 행정부는 다음 달 12일부터 모든 수입 철강 제품에 25% 특별 관세 부과하기로 했다. 업계에서는 이를 계기로 글로벌 철강업계의 '관세 전쟁'이 본격화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1기 시절에도 무역확장법 제232조를 적용해 수입 철강에 25% 보편 관세를 부과했다. 당시 한국은 협상을 통해 2015~2017년 연평균 수출량(약 383만 톤)의 70%인 263만 톤까지만 무관세를 적용받는 쿼터제에 합의했고, 해당 조치 이후 대미 철강 수출량은 100만 톤가량 줄었다.
트럼프 집권 2기와 함께 시작된 미국 정부의 관세 폭탄에 국내 철강업계는 현지 투자 확대를 대응한다는 전략이다. 현대제철은 10조원가량을 투자해 미국에 첫 제철소를 지을 예정이다. 현재 공장 부지로는 인근 조지아주에 소재한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에 자동차용 철강을 공급할 수 있는 남부 루이지애나주가 유력 후보지로 검토되고 있다. 포스코 역시 미국 현지 생산 방안을 검토 중으로, 현지 합작 법인을 설립하거나 현지 제철소 인수 등 다양한 방안이 거론된다. 세아그룹은 텍사스주에 연간 6,000만 톤 규모의 특수합금 공장 건설을 추진 중인데, 트럼프의 관세 정책으로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는 조선·자동차 산업에 원자재를 대는 후방 산업인 철강산업이 미국 시장 진출을 계기로 국내 시장에서의 부진을 털어내고 또 다른 기회를 찾을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에서는 더 이상 일본·중국산 저가 철강재와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데다 트럼프 행정부가 현지의 선박 건조 및 방산 시장을 키울 경우, 현지에서 생산된 한국 기업들의 철강 제품 수요가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국내 일자리다. 기업들은 달라진 통상 환경에 따라 생산 시설을 옮기며 대응할 수밖에 없는데, 그 영향으로 한국 내 생산량이 줄 경우 공장 가동 중단, 인력 조정 등 구조조정이 불가피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