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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부터 시작한 경영 통합 논의 중단 시스템 일원화 요구 등 닛산 자존심 자극 업계 “사풍 다른 회사, 협상서 상당한 잡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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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산과 혼다의 경영 통합이 백지화된 가운데, 양사의 합병 논의 중단이 닛산의 '자만심' 때문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닛산이 무릎 아래까지 괴사한 상태에서 혼다의 도움이 절실했음에도 경영진이 이를 슬기롭게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닛산 '이상한 자만심' 있다"
20일 일본 언론 데일리신초는 '혼다가 닛산을 버린 이유는'이라는 기사를 통해 “닛산과 혼다의 통합은 표면적으로는 대등해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혼다가 닛산을 구제하는 과정이었다"고 보도했다. 데일리신초는 "혼다의 시가총액(7조6,000억 엔)은 닛산의 5배로, 경영통합 이후 공동 설립하는 지주회사의 경영진은 혼다가 선택하며 이사도 과반수 지명하기로 돼 있었다”며 “그러나 닛산이 혼다의 도움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회사 내부 의견을 하나로 묶지 못한 우치다 마토코 닛산 사장의 능력이 의심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닛산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잇따르고 있다. 모터 저널리스트 오카자키 고로는 “닛산 이사회는 마치 기득권을 지키고 싶은 사람들로 이뤄져 있는 것처럼 보이며, 혼다는 그런 닛산 경영진의 문제를 깨달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경제 저널리스트 이노우에 히사오는 “2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닛산은 르노에 의해 구제가 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보다 역사가 짧은 혼다에게 구제를 받는 것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는 이상한 자만심이 있다”며 “현재로써 닛산의 자력 재건은 바라기 어려우며, 인체에서 말하자면 이미 무릎 아래까지 세포가 괴사해 조금만 더 가면 무릎 위까지 도달할 것 같은 느낌이다. 하체를 잘라내지 않으면 온몸에 독이 돌게 되는 상태”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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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행은 예견된 수순
앞서 혼다와 닛산은 지난해 12월 23일 기자회견을 통해 경영통합을 위한 협의에 들어가기로 기본 합의했다고 발표하며 오는 6월 통합계약을 맺고 지주회사를 2026년 8월까지 설립시키겠다고 밝혔다. 이에 업계에서는 합병이 성사될 경우 2023년 판매량 기준으로 세계 3위권(800만 대)으로 뛰어오른다는 점에서 이번 빅딜을 ‘세기의 통합’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혼다와 닛산 측은 돌연 2월 실적발표에서 경영통합이 결렬됐음을 알렸다. 두 기업은 협상 초기부터 지주사 지분 비율과 자산 가치평가를 두고 충돌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혼다는 닛산이 경영난을 극복하기 위해 내놓은 자구책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닛산이 지난해 11월에 발표한 9월 중간 결산은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90.2% 감소한 329억 엔(약 3,150억원), 순이익도 93.5% 감소한 192억 엔이었다. 혼다 내부에서 ‘참담한 수준’이라는 반응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 실적이었다. 이로 인해 혼다는 경영통합을 위해 닛산 측에 부진한 실적을 개선할 수 있는 자구책 마련을 요구했고, 닛산은 전 직원의 7%에 해당하는 9,000명과 차량 생산 능력의 20% 감축이라는 '턴어라운드 계획'을 내놨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사업 재생 계획 수립은 전혀 진척되지 않았고 현 경영진의 고집이 더해지면서 양사 간의 간극은 더욱 벌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분노한 혼다 측에서 지난달 말 닛산에 자회사화와 'e-파워(Power)' 기술을 포기할 것을 타진했는데, 이것이 닛산 측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지난 5일 열린 이사회에서 반대의견이 잇따르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후 6일 혼다 본사를 방문한 닛산의 우치다 사장이 협의를 중단하고 백지화하겠다는 뜻을 전달하며 양 측은 결국 파경에 이르렀다.
수출 전략 실패에 하이브리드 포기까지, 닛산 경영진의 '반복된 악수'
이 같은 닛산 경영진의 판단 오류는 닛산이 무너진 배경이기도 하다. 특히 1960~70년대 미국 시장에 진출하며 일본에서 인기 있었던 고급 세단을 중심으로 판매 전략을 짰던 것은 뼈아픈 실수로 각인돼 있다. 당시 닛산은 메르세데스-벤츠, 캐딜락과 같이 쟁쟁한 대형 세단 브랜드들을 고려하지 못한 채 세피로, 세드릭, 글로리아 같은 내수 인기 차종을 그대로 수출했다. 그동안 중형 세단인 토요타의 캠리와 혼다의 어코드는 미국에서 선전했고, 닛산은 중형 세단 라인에서 밀리며 쓴맛을 봤다. 90년대엔 비슷한 세단류를 차종을 남발하며 소형차, SUV 포트폴리오를 확보하지 못해 재무적으로도 크게 악화됐다.
이후엔 하이브리드 개발에 뒤쳐진 것이 현재까지 닛산의 발목을 잡고 있다. 닛산은 2010년 최초의 양산형 전기차인 리프를 선보이며 기술을 선도하는 듯했으나, 생각보다 전기차 시대가 빨리 오지 않았고 개발을 포기한 하이브리드가 친환경 시장을 주도하며 닛산의 회복세를 가로막았다.
여기에 2018년 르노에서 파견한 카를로스 곤 CEO(최고경영자)를 해임한 사건은 닛산 경영진의 뿌리 깊은 정치주의적 문화를 단적으로 드러낸 사례다. 표면적으로는 카를로스의 불법 행위가 이유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르노의 영향력을 차단하려던 일본 경영진의 쿠데타였다. 당시 카를로스 곤을 불법적으로 체포하고 감금까지 한 사실에 전 세계에 알려지며, 닛산은 물론 이에 가담한 일본 정부에 대해서도 강한 비판이 일었다.
이로 인해 닛산은 르노와의 협업이 중단됐고, 결과적으로 실적이 다시 급격히 나빠졌다. 르노와의 관계가 불안정해지면서 닛산의 글로벌 전략이 혼란에 빠진 탓이다. 또한 내부 권력 다툼으로 인해 경영진이 자주 교체됐고, 카를로스를 축출한 사이카와 히로토 전 CEO도 내부 문제로 2019년 사임하며 리더십이 붕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