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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감 넘쳐나는 한화오션·삼성중공업 신규 수주 일부는 외국에서 건조 계획 수익성 높은 선박은 한국, 기술 평준화 선종은 해외 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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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치 수주잔고를 쌓아둔 국내 조선사들이 해외 외주 생산을 검토하고 있다. 국내 조선소의 독(dock·물을 채우고 뺄 수 있게 만든 선박 건조 작업장)이 꽉 차 있어 새로 수주하는 선박 중 일부 물량을 외국에서 건조하려는 것이다. 조선업 호황이 몇 년 더 이어질 것이란 전망 속에 국내 조선사들은 수익성이 높은 선박은 한국에서 만들고 건조 기술력이 평준화된 선종은 해외 협력사로 넘기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한화오션·삼성중공업, 해외 외주 검토
17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한화오션은 지난달 인도 정부 측 요청으로 인도를 방문해 약 열흘간 스완중공업 산하 조선소, 코친조선소, 힌두스탄조선소, L&T조선소 등을 둘러봤다. 앞서 인도 정부는 주요 조선소 관계자들과 대표단을 꾸려 지난해 말 한국을 방문해 한국 조선사에 선박 건조·수리 분야 협력을 요청했다. 당시 인도 대표단은 한화오션, HD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조선소를 모두 둘러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한화오션 거제조선소 슬롯(선박 건조 공간)은 꽉 찬 상태다. 이 때문에 인도 조선소에 일부 물량을 넘겨 제작할 수 있을지 검토하고 있다. 변수는 인도의 조선업 기술력이다. 현재 인도 조선소는 중소형 선박 위주로 건조하고 대형 선박은 직접 만들지 못하고 있다. 인도 대표단이 한국을 직접 찾아 조선업 협력을 요청한 것도 궁극적으로 한국 조선소의 기술 이전과 전수를 기대하는 측면이 크다.
삼성중공업은 일부 건조 물량을 중국으로 보낸 상태다. 지난해 10월 말 아프리카 선주가 발주한 4,593억원 규모 수에즈막스급(수에즈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최대 크기 선박) 유조선(탱커) 4척의 건조를 중국 저우산조선소에 맡겼다. 저우산조선소가 현지 시설과 인력을 이용해 배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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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공화당, 동맹국에 '군함 건조' 허용 법안 발의
조선업계는 올해도 상선 부문에서 수년 치 수주잔량을 유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화오션의 경우 지난해 액화천연가스(LNG·Liquefied Natural Gas) 운반선 19척, 컨테이너선 6 척, 탱커 8척, 액화석유가스(LPG·Liquefied Petroleum Gas) 운반선 5척 등 상선 부문에서만 40척 가까이 수주했는데, 올해는 상선 부문 수주액이 지난해보다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 많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LNG 수출 확대를 추진하면서 LNG 운반선 발주 증가가 예상되는 데다, 미국의 중국 제재 강화로 컨테이너선 발주도 한국으로 몰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미 해군 군함 건조를 한국 등 동맹국에 맡길 수 있게 하는 ‘해군준비태세 보장법’ 등도 호재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지난 5일(현지시간) 마이크 리, 존 커티스 미 공화당 상원 의원 주도로 해군준비태세 보장법이 발의됐다. 미국은 1920년 연안 항구를 오가는 민간 선박은 자국 내에서만 건조하도록 한 존스법을, 1965년과 1968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 군함을 자국 조선소에서만 건조하게 한 번스-톨레프슨 수정법을 각각 도입해 자국 조선 산업을 보호해 왔다. 그런데 최근 자국 조선업 약화로 중국에 전투함 숫자가 역전되는 등 해양 패권에 대한 위기감이 커지자, 급한 대로 군함 건조부터 동맹국에 맡길 수 있게 규제를 풀기로 한 것이다. 이 법안은 상·하원 다수를 차지하는 공화당에서 발의돼 의회 통과도 무난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에 업계에서는 한국 조선업에 새로운 시장이 열릴 수 있다는 관측이 팽배하다. 현재 중국을 제외하고 미국의 동맹국 가운데 함정을 만들 역량이 있는 나라가 한국과 일본 정도밖에 없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지난해 11월 당선 직후 윤석열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한국의 세계적인 군함과 선박 건조 능력을 잘 알고 있고 긴밀하게 한국과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를 두고 당시 미국 매체들조차 “K조선에 미국이 사실상 SOS(구조 요청)를 했다”고 해석했다.
이번에 발의된 법안 문구에는 “미국이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국가 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에 미 해군 함정 건조를 맡길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 세부 조건으로 외국 조선소에서 건조하는 비용이 미 조선소보다 낮아야 하고, 미국 군함을 제조할 외국 조선사는 중국 소유이거나 중국 투자를 받아선 안 된다는 규정도 명시해 놓고 있다. 현재 글로벌 선박 수주 시장에서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의 점유율은 90% 수준이다. 따라서 이번 법안에 규정한 조건을 충족하는 선박 제조 국가는 사실상 한국, 일본뿐이다. 특히 한국이 수혜를 더 볼 것이란 전망이 많다. 미국은 당장 배를 만들어 전선에 투입해야 하는데, 현재 신속하게 함정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역량은 한국이 일본을 크게 앞선다.
중국 조선사들, 한국 턱밑 추격
최근 글로벌 조선 시장에서 중국과 경쟁이 치열한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는 점도 한국 조선사들이 해외 외주를 검토한 배경으로 꼽힌다. 조선업 굴기를 자랑하는 중국이 최근 세계 선박 시장에서 물량을 싹쓸이하고 있는 만큼 해외에 독을 추가로 건설해 생산 물량을 확대하려는 전략이다. 조선업계에 따르면 지난 2023년 중국은 한국을 제치고 조선업 종합 경쟁력 1위를 차지했다. 이는 중국 정부가 '해양 굴기’ 전략을 실천한 결과다. 특히 중국이 보유한 상선은 선복(船腹)량 기준 세계 1위로, 중국의 선복량은 한국보다 4배나 많다.
우리나라가 중국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분야는 수익성이 좋은 가스 운반선과 컨테이너선 분야지만, 해당 분야 역시 언제 역전될지 모를 정도로 위태롭다. 현재 중국은 수익성이 낮은 벌크선·컨테이너선·유조선 수주량이 많으나, 고부가가치 선박인 가스 운반선이나 친환경 선박도 수주하는 등 다양한 선종으로 포트폴리오를 갖추며 우리를 추격하고 있다.
실제 최근 중국이 부가가치가 높은 크루즈선과 초대형 LNG 운반선도 인도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이 같은 위기감을 방증한다. 부동산 경기 침체로 철강 후판 등 조선 원자재의 가격이 덤핑 수준으로 하락하면서 가격경쟁력을 갖춘 데다, 정부의 전략적 지원정책과 국영 조선소를 기반으로 형성된 안정된 산업 생태계가 구축된 것은 특히 위협적이다.
중국은 2002년 중국공산당 제16차 당대회에서 조선산업에 대한 ‘해양 굴기’를 선언했고 2012년 제18차 당대회에서 '해양 강국 건설' 계획을 발표하며 해양산업 발전에 국가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중국의 청사진인 '조선산업 친환경 발전 개요'에 따르면, 2025년까지 조선업의 친환경 발전 체계를 구축하고 조선기자재의 공급 역량을 더욱 강화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또한 2030년까지 중국 선박 공급망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세계 조선 시장을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