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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스테이블코인 법제화 법안에 서명 中 주도 CBDC 도입은 영구적으로 금지 美·中 엇갈린 전략, 통화 패권 경쟁 본격화

미 하원이 지난주 주요 가상자산 관련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중에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entral Bank Digital Currency·CBDC) 발행을 전면 금지하는 법안도 포함됐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반영된 것으로, 그는 지난해 대선 기간부터 CBDC가 개인과 기업의 자금 흐름을 추적해 금융 활동을 감시할 수 있다고 우려하며 디지털자산 체계의 재편을 요구해 왔다. 미국은 이번 법안 통과로 CBDC 도입을 금지하는 대신 스테이블코인을 ‘탈CBDC’ 대안이자 디지털 시대 달러 패권 유지 수단으로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美 하원, 크립토 위크서 디지털자산 법안 가결
21일(현지시각) 정계에 따르면 미 하원은 지난 17일 디지털자산 관련 법안을 중점적으로 논의하는 '크립토 위크(Crypto Week)'를 통해 △스테이블코인규제법(GENIUS Act) △디지털자산시장구조법(CLARITY Act) △CBDC 금지법(Anti-CBDC Act) 등 3건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공화당 내 보수 강경파 의원들의 반발로 여러 차례 표결이 지연되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최종 찬성 308표, 반대 122표로 가결됐다. 이어 다음 날인 18일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이른바 '지니어스법안'으로 불리는 스테이블코인규제법에 서명했다.
아직 디지털시장구조법과 CBDC금지법의 서명 절차가 남아있지만, 이번 크립토 위크에서 심의했던 3개의 법안이 하원을 통과함에 따라 디지털자산 규제의 불확실성이 상당 부분 해소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에 비트코인을 비롯한 주요 가상자산과 코인베이스 등 관련 종목 주식에 대한 투자 심리가 개선되면서 가상자산 시장에 자금 유입이 확대될 전망이다. 법안 논의가 본격화된 지난 14일 비트코인은 장중 12만2,944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 뒤, 현재 11만8,000달러~12만 달러(약 1억6,000만원)선에서 등락을 이어가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의 법제화와 함께 이번 크립토 위크의 또 다른 핵심 기조는 CBDC 전면 금지다. ‘CBDC 금지법’은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CBDC를 발행·공급·운영하는 행위를 전면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CBDC는 전자적 형태의 중앙은행 화폐로, 모든 자금 흐름을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있어 개인이나 기업의 금융 활동을 감시하는 도구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돼 왔다. 그동안 연준을 비롯한 주요 경제기관들은 디지털 달러 시스템 도입을 위해 수년간 연구를 이어왔지만, 이번 법안 통과로 관련 논의는 사실상 제동이 걸린 셈이다.
트럼프 "CBDC는 국민 감시하는 위험한 도구"
이 같은 CBDC에 대한 기조 변화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본격화했다. 그는 대선 후보 시절부터 CBDC를 ‘정부의 감시 도구‘,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수단’으로 규정하며 강력해 반대해 왔다. 취임 직후인 올해 1월에는 '미국 디지털 금융 기술 리더십 강화(Strengthening American Leadership in Digital Financial Technology)'라는 제목의 행정명령 14178호를 발동해 CBDC와 관련한 연구, 실험, 발행, 권고 등을 전면 금지했다. 이는 조 바이든 행정부가 2022년 발표한 디지털 자산 정책 청사진인 행정명령 14067호를 사실상 폐기하는 조치다.
이어 지난 18일 지니어스법안 서명 직후 이어진 백악관 브리핑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CBDC는 연방정부가 국민의 자산과 거래를 통제할 수 있는 위험한 수단"이라며 "나는 이미 행정명령으로 CBDC 발행을 금지했고, 곧 이를 법제화해 영구적으로 금지하겠다"고 밝혔다. 향후 어떤 정부가 들어서도 CBDC 도입이 불가능하게 만들겠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어 "이 모든 것은 미국의 정체성, 즉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조치"라며 "미국은 결코 중앙집중형 디지털 화폐로 국민의 자유와 사생활, 경제를 침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조치가 미 국채 수요 확대를 위한 정책적 판단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하는 대규모 감세 정책은 재정 적자와 국채 발행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글로벌 자본 시장에 확산되고 있는 '셀 아메리카(Sell America)' 흐름이다. 최근 미 국채 금리가 오르는데도 달러 가치는 떨어지는 이례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지난 4월 트럼프 대통령이 보편관세 10%와 국가별 상호관세 부과 방침을 밝히자 10년 만기 미국 국채 금리는 연 4.13%에서 4.41%로 상승했지만, 같은 기간 달러인덱스는 4.15% 하락했다.
이런 상황 속에 미국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를 새로운 '국채 수요자'로 육성하려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는 해당 코인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달러를 준비자산으로 보유하는데, 미 정부는 이들이 달러 대신 국채를 준비자산으로 보유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 발행 요건, 담보 기준 등을 정한 지니어스법안에는 준비자산을 미 법정통화, 중앙은행 예치금, 잔존 만기 93일 이내의 미 국채 등을 명시했다. 실제로 스테이블코인 시장을 양분하는 USDT와 USDC가 준비자산으로 보유한 미 국채만 1,260억 달러(약 175조원)에 달한다.

中, 탈달러화 흐름 속 디지털 위안화 영역 확장
전문가들은 미국이 스테이블 코인 체제를 법제화와 함께 CBDC 도입을 전면 금지함에 따라 이미 CBDC를 안착시킨 중국과의 통화 패권 경쟁이 본격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은 중앙은행인 인민은행 주도로 세계에서 가장 앞선 수준의 디지털 위안화(DCEP)를 시범 운영하고 있다. 2020년 선전, 쑤저우, 베이징 등 주요 도시를 시작으로 현재 200여 개 도시에서 디지털 위안화 기반 결제가 가능하다. 전자지갑 앱인 디지털위안(数字人民币)은 수억 명의 사용자 기반을 확보했으며, 공공기관 급여 지급, 대중교통 결제, 온라인 쇼핑 등 다양한 영역에 적용되고 있다.
나아가 중국 정부는 디지털 위안화를 단순 결제수단 차원을 넘어 위안화 국제화와 중국의 경제·금융 패권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를 위해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는 외국인 참가자에게 디지털 위안화를 결제수단으로 제공했고, 홍콩에서는 본토 은행 계좌 없이도 디지털 위안화 사용이 가능하도록 하는 등 국제적 사용 사례를 점차 늘려가고 있다. 최근에는 지정학적 갈등 심화로 탈달러화 흐름이 확산하면서 아시아를 비롯해 일대일로(BRI) 국가, 신흥국 등을 중심으로 위안화 결제의 반경을 넓혀가고 있다.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 따르면 7월 기준 위안화의 국제 결제 비중은 2.2%로 달러화(40%)에 비해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지만 중국이 우호국과 교역국을 중심으로 디지털 위안화의 사용 범위를 확대할 경우, 위안화 국제화에 새로운 동력이 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미국 역시 위안화의 확산을 견제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월스트리트저널(WSJ), 블룸버그통신 등 현지 언론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CBDC 전면 금지 법안을 두고 "미 달러의 글로벌 영향력에 도전할 수 있는 ‘디지털 통화 파생 무기’로 성장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반영된 조치"라고 분석했다.
한편 두 나라가 디지털 화폐를 둘러싼 패권 경쟁에 돌입했지만, 한국은 아직 구체적인 노선이 정하지 못한 상황이다. 한국은행이 그간 CBDC 도입을 추진해 왔으나,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 당시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공약으로 제시하면서 미국식 모델로 관심이 집중됐다. 다만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공식 석상에서 민간 발행 스테이블코인은 부작용이 크다고 밝혀 반대 의견도 주목받고 있다. 조승래 국정기획위원회 대변인도 “스테이블코인 발행 주체와 인허가 방식, 다른 나라와의 관계 등 다양한 쟁점이 남아 있다”고 말해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