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공급망 ‘중국 배제’ 움직임 가속화
반중 전략 핵심 전선으로 아세안 지목
중국은 제조 거점 다변화 추세 강화

미국이 베트남에 중국산 부품 사용을 줄일 것을 요구한 가운데, 동남아시아를 둘러싼 공급망 갈등 또한 격화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위시한 미국 정부는 동남아를 잃으면 중국과의 기술·지정학적 경쟁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아세안 시장 재편에 속도를 내는 중이다. 이에 중국 기업들조차 동남아에서 발을 빼고 새로운 생산 거점으로 이집트를 선택하는 등 글로벌 공급망의 탈(脫)동남아 현상도 가시화하는 양상이다.
중국 기술 활용 제품에 고관세 예고
17일(이하 현지시각) 로이터통신은 내부 소식통을 인용해 미국 정부가 베트남과의 관세 협상에서 중국산 부품·기술 사용 축소를 요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소식통은 “미국은 베트남이 중국산 첨단 기술 의존도를 낮추길 원한다”며 “이는 중국 부품 의존도를 줄이려는 미국의 공급망 재편 전략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애플, 삼성전자 등 글로벌 IT 기업의 핵심 생산 기지로 자리 잡은 베트남은 여전히 상당 부품을 중국에서 조달 중이다.
실제 지난해 베트남은 중국으로부터 440억 달러(약 60조3,000억원) 상당의 전자부품, 컴퓨터, 휴대폰 등 기술 제품을 수입했다. 이는 중국의 전체 베트남 수입 중 약 30%를 차지하는 규모다. 베트남 정부는 현지 부품 조달 확대를 위해 기업과 협의하고 있지만, 기술 확보와 실제 전환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베트남 현지 공급망 전문가인 카를로 치안도네는 “베트남은 공급망 규모와 정교함 측면에서 중국보다 15~20년가량 뒤처져 있다”고 진단하며 “현지 산업계도 변화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자칫 급격한 변화는 기업 생존에 치명적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베트남산 제품에 최고 46% 고율 관세를 매길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같은 관세가 현실화하면, 미국을 최대 수출시장으로 둔 베트남에는 타격이 불가피하다. 90일의 관세 유예가 종료되는 7월 8일이 다가오고 있지만 양국 간 최종 합의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또 럼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은 이르면 이달 말 미국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전략적 입지 재조정 의도
트럼프 행정부가 베트남을 포함한 아세안 국가들에 압박을 가하는 배경에는 명확한 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다. 동남아 시장을 단순한 생산 거점이 아니라 중국을 포위하고 기술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핵심 축으로 본 것이다. 특히 반도체와 배터리, 통신 장비 등 첨단 기술 산업의 글로벌 공급망에서 아세안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한 만큼 이 지역을 자국 중심의 산업 블록 안에 편입시키는 것이 중국 견제를 위한 선결 조건이라는 판단이다.
아세안은 미국과 중국 양측으로부터 동시에 기술 협력 및 투자의 타깃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은 반중 동맹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에 첨단 제조 인프라 투자를 대폭 확대했으며, 이들 국가를 통해 중국 이외의 생산 거점을 구축하는 데도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중국 또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등 여러 무역 협정을 활용해 아세안과의 경제적 유대 강화에 한창이다.
이러한 양국의 전략은 오랜 시간 외교적 유연성을 강조해 온 아세안 국가들에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아세안은 역사적으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해 왔지만, 이번처럼 명확한 기술 공급망 배제를 강요받는 상황은 선택지를 좁히는 압력일 수밖에 없다. 특히 미국의 조건을 수용할 경우 단기적인 산업 공백과 비용 부담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그 압력의 강도 또한 상당할 전망이다.
중국도 탈동남아, 공급망 회피 위한 제삼국 이동
미국의 동남아 압박이 본격화하면서 중국 기업들도 하나둘 철수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고율 관세와 강도 높은 기술 제재가 아세안에도 적용될 가능성이 큰 만큼 동남아 생산기지를 조정하거나 완전히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 또한 고려하는 추세다. 대표적 사례로는 중국 제조업체들이 이집트를 새로운 생산 거점으로 점찍은 움직임이다.
이집트 투자청에 의하면 지난 5월 말 기준 이집트에는 2,800개 이상의 중국 기업이 진출해 있으며, 누적 투자액은 80억 달러(약 10조8,904억원)를 상회한다. 이는 2018년 1,200개 기업이 진출해 있던 데서 두 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OPPO(오포), ZTE, GAC모터 등 대형 브랜드를 비롯해 중소 부품, 섬유, 가전 업체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는 설명이다.
이집트는 미·중 사이의 지정학적 긴장이 직접적으로 미치지 않는 지역인 데다, 유럽과 중동 시장을 동시에 겨냥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아프리카연합(AU) 및 다양한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수출입 과정에서 발생하는 관세 부담이 비교적 낮다는 점 또한 특징이다. 아울러 친중 성향의 정부 정책, 외국인 투자 인센티브, 안정적인 정치·치안 환경 등도 이집트 진출의 매력 요인으로 꼽힌다.
이러한 변화는 향후 미·중 갈등의 외연이 확장될 경우, 동남아 역시 안전한 우회지가 될 수 없다는 인식을 반영한다. 한 무역 업계 관계자는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등은 지난 10년간 ‘차이나 플러스 원’ 전략의 최대 수혜국으로 떠올랐지만, 미국의 압박과 중국의 후퇴가 동시에 발생할 경우 오히려 생산 거점으로서의 매력이 반감될 수 있다”며 “이들 국가가 어느 쪽 편에도 명확히 설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진다면, 기업 입장에서는 규제가 적고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새로운 제조 허브를 탐색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일 것”이라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