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액 증가에도 설비투자는 주춤? ‘숨 고르기’ 들어간 반도체 업계, 하반기 투자 확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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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업계 설비투자 감소세, 수출액은 전년 대비 49.9% 증가
반도체 수요 흐름의 중심은 AI, 의도적인 '속도 조절' 나선 듯
하반기 설비투자 확대 준비, SK하이닉스 올해 투자액 50% 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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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업체들이 설비투자(CAPEX)에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잠시 ‘숨 고르기’에 나서는 한편 정부 보조금 수령을 타진하겠단 취지로 풀이된다. 다만 반도체 업계 특성상 장기적인 투자 지연은 치명적인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올해 하반기엔 다시 설비투자가 확대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실제 SK하이닉스는 이미 설비투자액 50% 확대를 발표하기도 했다. 반도체 업체들도 준비 단계를 거치고 있단 방증이다.

반도체 수출은 증가, 설비투자는 감소

16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연구진은 지난 8일 발표한 수정경제전망에서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5%로 제시했다. 지난 5월 발표한 전망치 2.6%에서 0.1%p 하향 조정한 것이다. 이에 대해 16일 KDI는 “반도체 경기 호조세가 투자로 이어지지 못했다”며 “반도체 덕에 수출이 살아나고 있으나 막상 설비투자가 저조해 반도체가 제힘을 내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2분기 국내총생산(GDP) 지표에서도 반도체 업계의 설비투자 축소에 따른 영향이 포착됐다. 지난달 25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2024년 2분기 연간 실질 GDP’ 속보치에 따르면 한국의 2분기 GDP 성장률은 전기 대비 -0.2%를 기록했다. 1분기 GDP 성장률이 1.3%로 높았던 점이 기저효과로 작용해 마이너스 성장을 유도했다는 게 한은의 설명이지만, 지표상 설비투자 감소가 눈에 띄게 나타난 것도 사실이다. 실제 이 시기 설비투자는 운송장비(자동차) 등에서 늘어난 반면 기계류(반도체제조용장비 등)에서 크게 줄어 총 2.1% 감소세가 나타났다.

반도체 제조용 장비 도입 지연에 따른 영향도 나타나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2분기 제조업 국내 공급 동향’에 따르면 반도체 품목 국내 공급은 지난해 4분기(-11.1%), 올해 1분기(13.0%)에 이어 3분기 연속 감소세를 이어갔다. 2분기 반도체 품목 국내 공급은 전년 동기 대비 17.4% 감소했다. 감소량은 각각 국산이 8.1%, 수입이 24.2% 정도다.

이에 반해 수출은 오히려 늘었다. 관세청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반도체 수출액은 658억3,000만 달러(약 87조8,000억원)로 전년 동기 대비 무려 49.9%나 증가했다. AI 시장 성장 및 IT 기기 시장 회복에 따른 반도체 수요 증가로 국산 반도체 수출이 급증한 것으로 풀이된다.

설비투자 뒷걸음질, ‘숨 고르기’ 및 ‘보조금 수령 압박’ 목적?

눈에 띄는 건 그간 수출 등 출하가 증가하면 1분기가량의 기간을 두고 설비투자가 동반 상승해 왔단 점이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주요 반도체 업체들은 좋은 실적을 거뒀던 2022년 1분기 수출이 전기 대비 3.0% 증가하자, 그해 2분기(1.4%)와 3분기(5.7%) 연속으로 설비투자를 전기 대비 큰 폭으로 증가시킨 바 있다.

지난해에도 투자액을 늘리는 모습이 보였다. 삼성전자의 지난해 설비투자비는 53조1,139억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였던 2022년(53억1,153억원)과 대동소이했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DS(반도체)부문이 48조3,723억원, SDC(디스플레이)가 2조3,856억원, 기타가 2조3,560억원인데, DS부문 설비투자 증가세가 특히 컸다. DS부문은 2021년 43조5,670억원(90.34%)에서 2022년 47조8,717억원(90.12%), 지난해 48조3,723억원(91.07%)으로 투자가 늘었다.

이런 가운데 올해 설비투자가 뒷걸음질 치자 전문가들 사이에선 “반도체 불황기 때 교훈을 얻은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과거 반도체 업체들은 반도체 가격이 내려갈 때도 시장 점유율 확보를 위해 증산 기조를 유지하고 설비투자를 지속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최근엔 반도체 수요가 AI 쪽으로 급격하게 이동하면서 기업들이 선뜻 설비투자를 늘리기가 어려워졌다. 앞서 범용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해 늘렸던 설비가 재고 증가라는 부작용으로 이어진 바 있단 점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한편에선 반도체 증산 기조를 버리고 설비투자를 줄임으로써 정부의 보조금 지원을 압박하겠단 취지 아니겠냐는 의견도 제기된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메모리 반도체 주요 3사(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의 D램 반도체 공급 증가 요인에서 설비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8~2020년 8%에서 2020~2022년 53%로 대폭 늘었다. 반면 동기간 ‘기술 발전’ 요인의 비중은 92%에서 47%로 크게 줄었다. 낸드플래시 역시 마찬가지로, 공급 증가 요인에서 설비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3%에서 42%로 크게 증가한 반면 기술 발전의 기여도는 97%에서 58%로 급격히 줄었다. 그만큼 설비투자에 대한 자본 투입이 업계 내 중요한 지표로 자리 잡았다는 의미다.

이에 반도체 업계 내에선 정부 지원금에 대한 중요도가 급격히 올랐다. 보조금 수령에 따른 이익 규모가 그만큼 커져서다. 산업계에 따르면 반도체 설비투자 보조금이 30% 지급될 경우 영업비용 대비 상당한 비중(약 40% 중반)을 차지하는 감가상각 비용이 감소해 반도체 생산에 최대 10%의 원가절감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 반도체 산업의 핵심 중 하나가 원가 경쟁력임을 고려하면 정부 보조금 수령에 반도체 업계의 열망이 높은 건 당연한 수순이다. 잠시 투자를 줄이고 숨 고르기에 들어간 사이 정부 보조금도 함께 노리는 전략도 충분히 구사할 만하다는 평가가 업계를 중심으로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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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 게임’으로 접어든 반도체 업계, “설비투자 장기 지연은 안 돼”

다만 전문가들은 설비투자가 장기 지연돼선 안 된다고 제언한다. 이종환 상명대학교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지금은 HBM으로 주력 분야가 바뀌는 상황이라 수출 지표가 좋아도 설비투자를 바로 늘리지 않고 일종의 준비 기간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반도체 투자는 2~3년 이후부터 효과가 나타난다. 올해 하반기 투자를 본격화하지 않으면 세계 각국이 공격적인 투자를 이어가는 반도체 산업에서 결국 뒤처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치킨 게임’ 양상으로 흘러가는 반도체 업계 특성상 설비투자를 잠시라도 멈추면 그 파급 효과가 상상 이상으로 클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렇다 보니 반도체 업체들도 하반기 투자를 본격화하기 위한 사전 준비 과정을 밟는 모양새다. 앞서 지난 2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에 반도체 패키징 공장을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이 공장은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에 사용되는 HBM 제조에 특화된 시설로 알려졌다. 미 패키징 공장 설립으로 SK하이닉스는 미국 시장에 입지를 확보하고 선도 기업과의 경쟁 우위를 가져갈 계획이다. 미국에서의 사업 확장 의지를 공개적으로 알린 셈이다.

설비투자액 확대도 공식화했다. SK하이닉스는 올해 설비투자액은 13조원 이상으로 지난해 대비 50% 이상 확대하고 내년에도 설비투자를 늘릴 방침이다. 반도체 호황에 HBM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발 빠르게 생산설비를 늘리겠단 취지로 해석된다.

설비투자를 위한 자금 확보도 어렵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4분기 흑자 전환에 성공한 바 있으며, 지난 1분기엔 2조8,860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려 최대 호황기로 꼽히던 2018년 1분기 이후 두 번째로 높은 실적을 거뒀다. 이에 따라 올해 1분기 부채는 85.92%로 직전 분기 87.52%에서 소폭 감소했다. 올해 전체 영업이익이 역대 최대였던 2018년(20조8,438억원)을 넘어설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특히 영업활동현금흐름에서 설비투자를 뺀 잉여영업현금흐름(FCF)은 13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하반기 설비투자를 본격화하기 위한 ‘실탄’이 충분하다는 의미다.

삼성전자 또한 하반기 설비투자 확대에 나설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점쳐진다. 지난 2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둘러싼 사법 리스크가 일부 해소된 데다 사내유보금이 146조원에 달하는 등 설비투자 확대를 위한 기반이 마련된 상태여서다. 특히 지난해 자사 내 반도체 사업 적자 규모가 15조원에 달했던 만큼, 경쟁력 확보 차원에서 설비투자액을 더 늘릴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