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레거시 반도체에 ‘올인’, 저가 공세에 반도체 공급망 장악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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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美 수출 규제에 막혀 첨단 반도체 생산 사실상 불가능
'과학기술 자립' 위해 예산 확대, 천문학적인 보조금 지원
중국산 레거시, 저가공세로 점유율 확대 '시장 잠식'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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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미국과 서구 동맹국의 첨단 반도체 규제에 대항해 ‘레거시(범용) 반도체’에서 활로를 찾고 있다. 당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중국의 반도체 기업들은 빠르게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있다. 중국산 레거시 반도체가 빠르게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면서 2027년 글로벌 시장의 3분의 1을 장악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미국, 유럽, 일본 등 주요국은 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中, 美 첨단 반도체 규제에 레거시 반도체로 선회

8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중국이 미국 등 주요국의 반도체 규제에 첨단 반도체 생산이 어려워지면서 ‘레거시 반도체’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레거시 반도체’는 2011년 양산을 시작한 28나노미터와 그 이전 공정에서 생산되는 구형 칩으로 인공지능(AI) 등에 사용되는 첨단 반도체보다 수준도, 가격도 저렴하지만, 가전부터 자동차, 항공기, 무기까지 다양한 제품에 쓰여 전체 반도체 시장의 70%를 차지한다. 후발 주자가 반도체 기술을 연마하고 공정과 관련한 전문 인력을 양성·확보하기에 용이하다는 장점도 있다.

미국의 초강력 반도체 제재에 가로막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과학기술 자립’을 핵심 목표로 정하고 첨단 반도체 기술을 스스로 개발해 미국을 뛰어넘자고 강조해 왔다. 하지만 한국·미국·유럽·일본·대만 등의 선진 기술이 총집결한 첨단 반도체를 중국이 단기간에 따라잡기는 쉽지 않았고 결국 중국은 이미 기술을 확보한 데다 양적으로 승부를 볼 수 있는 레거시 반도체 생산에 집중하면서 첨단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이른바 ‘버티기 전략’을 선택했다.

실제로 올해 중국 정부는 ‘반도체 굴기’와 관련해 과학기술 분야 예산은 전년 대비 10% 확대했는데 이는 국방예산 증가율 7.2%보다 큰 증가 폭이다. 중국의 반도체 기업을 위해 1,430억 달러(약 190조원)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규모의 반도체 보조금을 마련하고 270억 달러(약 35조9,000억원) 규모의 ‘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펀드’를 조성했다. 여기에 레거시 반도체 공장을 새로 짓는 자국 기업에 최대 10년까지 법인세를 면제하는 혜택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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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주요 반도체 설비투자 현황(2024.1.15. 기준)/출처=한국무역협회, 트렌드포스

2027년 전 세계 레거시 공급망의 3분의 1 장악

당국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중국의 레거시 반도체 생산능력은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지난해 중국 최대의 파운드리 업체인 SMIC는 상하이에 28나노 칩 공장 건설에 89억 달러(약 11조원)를 투자했고, 윈텍테크놀로지도 연간 웨이퍼 40만장 생산이 가능한 자동차용 반도체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반도체 생산을 위한 제조기계 수입도 늘어났다. 중국 해관총서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컴퓨터용 반도체 제조에 사용되는 장비 수입액은 전년 대비 14%가 증가한 400억 달러에 달한다.

국제 반도체 장비·재료 협회(SEMI)에 따르면 올해 신설하는 세계 반도체 공장 42개 중 18개가 중국 공장이다. 한국 1개, 일본 4개, 대만 5개와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큰 규모다. 이렇게 중국이 레거시 반도체 생산에 ‘올인’하면서 올해 1분기 중국의 반도체 생산은 전년 동기 대비 40%나 급증했다. SMIC의 1분기 매출은 17억5,000만 달러(약 2조4,000억원)로 글로벌 점유율도 직전 분기 대비 0.3%p 상승한 5.7%를 기록하며 파운드리 분야에서 처음으로 TSMC와 삼성전자에 이어 3위로 발돋움했다.

업계에서는 이 추세대로라면 향후 2~3년 안에 전 세계 레거시 반도체의 절반이 중국에서 생산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지난달 한국무역협회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생산능력 중 레거시 반도체 설비에 대한 중국 비중은 △2024년 29.1% △2025년 30.5% △2026년 31.1% △2027년 32% 등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반면 2027년 한국 7.3%, 대만 45.7%, 일본 1.8%, 북미 2.4% 등으로 다른 나라의 레거시 반도체 생산 비중이 점점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美·EU 등 현지 생산능력 확보 위해 보조금 강화

문제는 레거시 반도체가 이미 기술적으로 성숙한 부품이라는 점이다. 즉 기술우위보다는 가격우위가 시장에 더 큰 파급력을 미치기 때문에 중국이 전기차, 배터리, 철강 등 다른 제조업 분야에서 그랬던 것처럼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앞세워 전 세계 공급망을 잠식하며 생산을 독차지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더욱이 헐값으로 밀어내기 수출을 해 주도권을 쥔 중국이 향후 가격을 올리거나 공급량을 줄일 경우 공급망에 비상이 걸리면서 전례 없는 시장 교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이에 중국의 레거시 반도체 장악을 염려한 주요국은 자체적으로 생산능력을 확보해 중국 의존도를 낮추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미국은 칩스법(CHIPS Act)에 따라 보조금 등을 통해 자국의 반도체 기업이 현지 생산에 투자하도록 유도하는 한편 생산 지역을 다각화하기 위한 조치로 인도, 말레이시아 등 반도체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가에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다.

‘반도체 부활’을 선언한 일본도 공격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국적은 물론 첨단·레거시 반도체 여부에 상관없이 반도체 설비투자의 3분의 1까지 보조금을 지급하고 3년 내 생산능력을 10% 이상 올리면 세액 공제 10%를 제공하기로 했다. 유럽연합(EU)은 ‘EU 반도체법’을 발표해 반도체 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 근거를 마련하는 한편, 자동차용 반도체 중심 투자 확대를 추진 중이다. 이와 관련해 인텔과 TSMC 등이 독일에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중국산 레거시 반도체에 대한 규제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미 상무부는 올해 1월 중국의 레거시 반도체 보조금 지급과 덤핑을 지적하며 미국 내 기업을 대상으로 중국산 레거시 반도체 관련 공급망 조사를 개시한 바 있다. 4월에는 중국에 집중된 레거시 반도체 공급망 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을 비롯한 EU, 일본 등 동맹국들이 공동 대응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