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반도체 업계의 ‘코리아 패싱’ 현실화, “한국 설 자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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팻 겔싱어 인텔 CEO '인텔 AI 서밋 서울' 참석 취소 통보
대만 일정은 변경 없이 그대로 진행, 美·臺 파트너십 강화
짙어지는 한국 제외 움직임, "정부 지원 대폭 늘려야" 지적
Circuit board and AI micro processor,
사진=유토이미지

글로벌 AI 반도체 전쟁에서 한국이 점차 변방으로 밀리고 있다. 각 기업이 설계한 인공지능(AI) 서비스를 제대로 구현하려면 범용 칩이 아닌 맞춤형 반도체가 필요한데, 한국 기업들은 이 분야에서 힘을 못 쓰고 있어서다. 반도체 설계는 엔비디아, 애플, AMD 등 미국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 천하인 데다, 파운드리와 패키징은 대만 TSMC가 꽉 쥐고 있다. 여기에 예정돼 있던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의 방한마저 무산됨에 따라 미국과 대만 중심의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한국 중요도가 낮아지고 있다는 우려가 더욱 커지고 있다.

인텔 CEO, 6월 방한 무산

3일 업계에 따르면 겔싱어 CEO는 6월 4~5일 방한 계획을 취소하고 이를 지난달 말 파트너사들에 통보했다. 이에 당초 겔싱어 CEO가 진행할 것으로 여겨졌던 ‘인텔 AI 서밋 서울’ 행사 키노트(기조연설)는 저스틴 호타드 인텔 데이터센터·AI그룹 수석 부사장이 대신할 예정이다.

겔싱어 CEO는 6월 4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리는 ‘컴퓨텍스 2024 행사’ 키노트를 진행한 후 한국을 찾을 계획이었다. 이에 업계에선 그가 삼성전자 주요 경영진을 만나 AI 반도체에 필수인 HBM(고대역폭 메모리) D램 공급 확대와 AI PC 사업 협력 등에 관해 논의할 것으로 예측했다.

갑작스런 일정 변경에 일각에서는 최근 단행된 삼성전자 DS(디바이스설루션)부문장 교체와 연관이 있다는 추측이 제기됐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21일 반도체 사업을 담당하는 DS부문장을 기존 경계현 사장에서 전영현 부회장으로 교체했는데, 이와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인텔코리아 관계자는 “대만 일정은 변경 없이 그대로 진행된다”며 “한국 행사 불참은 내부 사정 때문”이라며 삼성전자 인사와의 연관설을 일축했다.

‘칩4 동맹’에서 한국만 소외

이렇듯 미국 빅테크들과 대만 TSMC가 맺은 파트너십에 한국 기업이 끼어들 틈이 점차 좁아지고 있는 모습이다. 엔비디아와 AMD가 최근 대만에 AI 연구개발(R&D) 센터를 짓는 등 동맹 수위를 높이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미국·대만 듀오’가 장악한 시스템반도체(비메모리) 시장 규모(2023년 기준 620조원)는 한국이 잘하는 메모리 시장(179조원)보다 3.5배 크다. 2022년 31%였던 한국의 10나노미터(㎚) 미만 첨단 반도체 생산 점유율이 2032년 9%로 쪼그라들 것이란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한국, 미국, 일본, 대만 등 ‘칩4 동맹’에서 한국이 소외되는 분위기도 짙어지고 있다. AI 시대를 맞아 고객사별 AI 서비스를 위해 맞춤형 반도체 설계·제작·후공정이 중요해지자 이 분야에서 약한 한국을 패싱하는 기류가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엔비디아의 ‘AI 가속기(AI 서비스에 최적화된 반도체 패키지)’가 어떻게 나오는지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엔비디아가 설계한 GPU는 대만 TSMC가 생산하고, 이 칩을 HBM 같은 고성능 D램과 한 칩처럼 작동하게 하는 ‘최첨단 패키징’도 TSMC가 맡는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소재와 장비는 대부분 일본 기업이 공급한다.

여기서 한국 몫은 SK하이닉스가 납품하는 HBM뿐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변수가 발생했다. 그동안 존재감이 없었던 마이크론이 ‘전력 소모 30% 감소’ 등을 내세우며 엔비디아 납품을 성사시킨 것이다. 엔비디아가 올해 하반기 출시하는 블랙웰 AI 가속기에는 마이크론의 5세대 HBM인 ‘HBM3E’가 SK하이닉스 제품과 함께 장착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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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대만-일본 ‘3각 동맹’ 강화, 한국 기업 위협

한국이 소외된 3각 동맹은 각 분야 1등 기업 간의 협력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위협적이다. 동맹에 속하지 못하면 비집고 들어가기 조차 힘든 구조다. 더욱이 이런 동맹은 갈수록 강화되는 분위기다. 이번 ‘컴퓨텍스 2024’에 엔비디아, AMD, 퀄컴, 인텔 등 미국 반도체 기업의 CEO가 총집결하는 것도 동맹 강화와 무관치 않다. 3일 컴퓨텍스 기조연설을 한 리사 수 AMD CEO는 “TSMC와의 동맹은 무척 공고하다”며 끈끈한 동반자 의식을 공표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최근 삼성전자가 설계, 생산, 최첨단 패키징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종합 반도체기업’의 이점을 발휘해 AI 반도체 ‘턴키 서비스’를 시작했지만 아직도 대형 수주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이에 AI 반도체 경쟁에서 한국 기업들이 살아남기 위해선 ‘고객 맞춤형’ 영업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 등 주요 반도체 고객사가 특화된 자사 AI 서비스에 최적화한 반도체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AI 반도체 생태계를 강화하고 기업 간 협업 사례를 늘려야 한다는 분석도 있다. TSMC가 미디어텍 노바텍 등 대만 팹리스를 적극 지원해 대형 고객사로 키운 것이 대표적이다. 정부가 미국, 일본, 중국, 대만과 달리 보조금 등 직접적인 지원에 소극적인 것은 아쉬운 대목으로 꼽힌다. 대만 정부는 미국 기업인 엔비디아의 R&D 센터 설립에 투자액(약 1조원)의 28%를 지원할 정도로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에 적극적인 반면, 우리 정부는 대기업 특혜를 이유로 세제 혜택을 통한 지원만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