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입 벌리고 사과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VC들

VC 심사역, “명확한 지표 없으면 투자 안 한다” 전문성 없는 VC들 탓에 ‘무늬만 벤처기업’에 투자금 몰려 단순 수치만 보고 투자하는 VC들, 자연 도태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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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B 투자 유치를 계획하던 한 스타트업 대표가 “광고비를 써야겠다”며 기자들에게 인터뷰를 부탁하고, 각종 보도자료를 만드는 작업 중이라 일이 많다는 푸념을 털어놨다. 굳이 그렇게까지 많은 자료를 외부에 공개해야 하느냐고 반문하니 “찾아서 볼 사람들이 VC하고 있나요? 자기 사업하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벤처투자사(VC)의 심사역들이 기업 자료를 미리 찾아보고 벤처기업과 미팅에 나서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것은 업계의 공공연한 상식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전직 외국계 IB 출신 관계자 A씨는 ‘같은 금융권, 같은 투자 인력’이라고 부르지만 모든 자료를 샅샅이 뒤져서 기업 미팅에 들어가지 않으면 큰 꾸중을 각오해야 하는 외국계 IB 대비 국내 VC들은 “날로 먹으려 한다”는 비속어 섞인 비난과 함께 ‘같은’으로 묶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투자받고 싶으면 다 만들어 와라

최근 들어 벤처기업들이 투자 유치하기가 쉽지 않은데,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하냐는 질문에 현재 VC 심사역인 B씨는 ‘명확한 지표’를 만들어와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 지표를 업계 비전문가가 알아보지 못할만큼 복잡한 경우에는 어떻게 되냐고 반문했더니 “그럼 투자 안 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같은 상황을 전해 들은 A씨는 이러니까 “날로 먹으려 한다”는 소리를 듣는 거라며, 회사를 이 잡듯이 뒤지는 업무가 주력 중 하나인 IB 뿐만 아니라, 급여나 시장 지위가 더 낮은 증권사 리서치팀도 신규 사업을 이해하기 위해 ‘지표’를 만들어야 인정받는 리서치 인력으로 인정받는 사정을 들었다. VC 업계가 증권 업계보다 인력 수준이 낮고 업무 태도가 불량한 만큼, 시장에서 ‘금융투자 전문인력’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VC 심사역 B씨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VC 업계 관계자들이 원하는 자료는 ‘돈을 잘 벌 수 있다는 것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단순화된 숫자’라고 입을 모은다. 심사역 본인도 사업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은 탓에 투자 심사 위원회에서 질문이 나왔을 때 대답하기 어려운 경우가 일상이라는 것이다. 즉 질문 자체가 나오지 않을 단순화된 값을 보여줘야 투자 심사가 순조롭게 흘러간다는 설명이다.

입 벌리고 사과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VC들

결국 VC들의 비전문성 때문에 전문적인 역량을 갖춘 벤처기업보다 화려한 포장을 잘하는 ‘무늬만 벤처’인 사업들에 더 많은 투자금이 흘러가게 된다. 정부를 대상으로 벤처투자 업계를 살려달라며 모태펀드의 필요성을 역설하지만, 정작 사회적 자본의 합리적 배분을 담당해야 하는 VC 업계 자체가 ‘헛발 차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IB 출신 A씨는 최근의 벤처투자 위기가 전문성 없는 VC들이 퇴출되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간 재무제표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VC 심사역들이 매우 많았던 데다, 심지어 영업현금흐름의 적절한 지표 중 하나인 ‘에비타(EBITDA)’도 계산할 줄 모르면서 전문 심사역이라고 주장해 스타트업 대표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돈줄을 쥐고 있는 VC가 ‘갑’인 탓에 재무지식으로 탄탄하게 무장한 스타트업 대표들이 일부러 VC의 무능에 맞춰준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콘텐츠 사업을 빠르게 상각 중이라 영업이익은 크지 않지만 현금흐름은 좋다는 스타트업 대표의 설명을 알아듣지 못한 VC가 “좀 쉽게 말해 달라”고 불평했다는 것이다.

VC 업계 자체가 전반적으로 인력 역량이 낮다 보니 투자설명회의 전문성도 함께 낮은 상황이다. 스타트업계에는 ‘기업설명회(IR)의 시작은 파워포인트, 마무리는 엑셀’이라는 속설이 있다. 복잡한 내용을 담기보다는 단순화한 수치와 그래프, 빠른 수익성을 확인할 수 있는 예상치를 얼마나 화려한 그래프로 잘 보여주느냐가 관건이라는 속설도 함께 따라온다.

쉽고 편한 투자만 찾는 VC들, 시장 성장하려면 VC 역량부터 키워야

VC 업계 전문가들은 단기적으로는 VC들이 쉽고 편한 투자만 찾고 있는 탓에 스타트업들이 각종 비용을 지불해 가며 설득 작업을 거쳐야 하지만, ‘투자 혹한기’를 거치며 스타트업들이 대부분 무너지고 나면 거꾸로 VC들이 ‘우물을 파야 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예측한다.

VC 경력 5년 후 창업에 뛰어든 한 스타트업 관계자는 현재처럼 단순한 수치만 보고 투자 결정을 하는 VC들은 자연히 도태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향후 2~3년간 인력 물갈이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정부가 모태펀드를 배분할 때 ‘과거 투자 기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전문 심사 인력들의 역량을 판단할 수 있는 합리적인 잣대를 마련해야 ‘입 벌리고 사과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VC들’이 사라질 것이라는 평도 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