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탁 거부’ 당했던 액셀러레이터 업계, 전담 수탁사 협약으로 투자 활기 되찾는다

수탁 거부 현상이 불러온 벤처 시장 침체기 전문가들, “이번 협약으로 시장 선순환 구축할 수 있을 것”

160X600_GIAI_AIDSNote

액셀러레이터(AC) 전담 수탁사가 생기면서 그간 업계에서 골머리를 앓았던 ‘벤처펀드 수탁 거부’ 현상이 상당폭 완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2020년 사모펀드 환매 중단 사태가 발생하면서 액셀러레이터를 포함한 소규모 펀드들은 적절한 수탁기관을 찾지 못하고 있던 가운데, 전문가들은 이번 협약을 통해 벤처 시장에 선순환 구조가 구축될 것으로 보는 분위기다.

왼쪽부터 궈밍쩡 유안타증권 대표이사, 신진오 한국엑셀레이터협회 협회장, 이병열 신한투자증권 IPS그룹장/사진=유안타증권

AC협회, 전담 수탁사 협약으로 벤처펀드 수탁 거부 현상해결

액셀러레이터협회(AC협회)가 신한투자증권,유안타증권과 투자조합 수탁 협력을 위한 협약식을 개최했다. 앞서 AC협회는 지난 5월 25일 임시이사회를 열고 두 증권사를 회원사의 전담 수탁사로 선정한 바 있다. 신한투자증권, 유안타증권은 이번 협약을 통해 1년간 협회 회원사의 수탁 업무를 전담할 예정이다. AC 회원사들이 조성한 벤처펀드는 규모와 상관없이 0.3%의 수수료만 부담하면 된다.

과거 사모펀드의 대규모 환매 중단 사태 후 수탁을 담당해 왔던 은행들이 신규 계약에 보수적 움직임을 취하면서, 그간 AC 업계에서는 제대로 된 수탁기관을 구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아 왔다. 공들여 출자자(LP)를 모으고도 은행들이 수탁에 비싼 수수료를 부르면서 벤처펀드 결성에 난항을 겪었기 때문이다. 또한 AC 특성상 소형 투자를 주로 담당하기 때문에 대형 펀드보다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도 한몫했다.

그러나 이번 협약을 통해 AC 업계의 가장 큰 애로사항이던 ‘벤처펀드 수탁 거부 현상’이 상당폭 개선될 전망이다. AC협회는 수탁 은행에게 0.3%의 합리적인 수탁 보수 책정료 기준을 제시하며, 운용사의 운용 위험을 관리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나아가 극초기 벤처 투자 영역의 AC와 기성 금융권 간 투자협력 체계 구축도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수탁 거부’ 현상의 원흉, 라임·옵티머스 사태

앞서 살펴봤듯 지난 2020년 ‘라임·옵티머스 환매 중단 사태’가 발생하면서 현재까지 은행을 필두로 한 사모펀드 수탁사들이 펀드 수탁을 꺼렸던 분위기가 형성됐다. 당시 대규모 사모펀드 사고가 연이어 발생하자 금융당국은 수탁사에 운용사의 부당·위법행위 감시 책임을 부여했고, 이에 따라 수탁사는 사모펀드 운용사의 재무 건전성을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보고해야 하는 등 책임이 커졌다. 그러나 이때 책임은 커진 반면 수탁 수수료는 0.05%~0.07% 선에 그쳤다. 금융기관이 굳이 모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펀드 수탁을 짊어져야할 유인이 사라진 것이다.

또한 2022년 초부터 본격 시행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하 중대재해법)’도 펀드 수탁 진입장벽을 높였던 주요인으로 꼽힌다. 특히 부동산 중심의 자산운용사는 부동산 자산을 신탁사에 위탁하고 소유권을 이전하는데, 이 과정에서 중대재해법이 시행되면서 부동산 소유권자가 된 신탁사가 실질적인 ‘지배·운영·관리 책임’이 있는 사업주 및 경영책임자로 인식됐다. 신탁사 입장에서는 수탁받은 건물에서 산업 재해나 인명 피해가 발생할 경우 책임을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한편, 법적 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수탁 기피 현상’이 심화되면서 AC를 포함한 중·소형 자산운용사들의 피해가 커지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벤처 투자시장에서는 최상위 기업들이 시장을 과점하게 됐다. 대형 자산운용사들은 대규모 펀드를 끌어오는 만큼 수탁사들의 높은 수수료를 감당할 수 있었으나, 소규모·신생 AC들은 높은 ‘수탁 장벽’에 막혀 벤처 투자시장 진입에 실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대형사들은 중대재해법 시행에도 기민하게 대처하며 건설사에 준하는 안전관리 관련 조직과 인력을 채용하는 등 몸집 불리기에 한창인 반면 부동산 시장에서 퇴출당한 중소형 자산운용사는 주식, 채권과 같은 전통 자산으로 눈을 돌린 게 작금의 현실이다.

그간의 노력에 드디어 결실을 맺다

정부 차원에서 이를 타개하기 위한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라임·옵티머스 사태 이후 수탁 거부 문제에 봉착하자 중소벤처기업부(이하 중기부)에서는 개인 투자조합의 경우 투자조합 재산 의무 위탁 기준을 종전 10억원에서 20억원으로 높이는 등 관련법 고시 개정을 통해 화재 진압에 나섰으나, VC가 결성하는 벤처투자조합에 대해서는 벤처투자법 제53조 1항이 단서 조항이 아닌 탓에 고시 개정을 못해 현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실제 지난해 4월 중기부가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결성금액 기준 지난 4년간 개인투자조합이 588% 성장한 반면 벤처투자조합은 101% 성장에 그쳤다. 벤처투자조합은 재산규모에 상관없이 반드시 은행을 재산에 위탁해야 하는 데다 앞서 언급한 이유로 인해 수탁을 거부당하는 경우가 많아 조합 결성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수탁기관을 찾지 못한 많은 AC가 펀드를 쪼개 투자하는 경우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펀드를 크게 결성하면 수탁을 맡겨야 하는 만큼, 벤처투자조합을 개인투자조합 여러 개로 쪼개 수탁 의무를 피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조합을 등록, 운영, 청산하는 절차들이 배로 늘어나는 등 행정 낭비가 심한 탓에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하는 임시방편에 불과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같은 배경에서 이번 소형 벤처펀드 지정수탁사 협약은 AC 업계에서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벤처투자조합 입장에서 더 이상 ‘수탁 거부’의 불안을 겪지 않고 스타트업 시장에 마음껏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신진오 AC협회장은 “업계의 오랜 숙원인 수탁 문제가 해결될 수 있어 다행”이라며 “AC가 초기 벤처투자 주체로 더욱 자유롭고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도록 협회가 지속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