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총재 “韓서 SVB 사태 터지면 예금 인출 속도 100배는 빠를 것”

이창용 총재 “미국보다 빠르게 진전된 한국의 디지털화, ‘디지털 뱅크런’에 취약해” SVB 파산 계기로 예금자 보호 한도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와 ‘디지털 뱅크런’의 진짜 문제는 가짜뉴스, 이 총재 “AI 감시체계 만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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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블룸버그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과 같은 사태가 한국에서 벌어졌다면 예금 인출 속도가 미국보다 100배는 더 빨랐을 겁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3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블룸버그와 가진 인터뷰가 화제다. 이 총재는 이날 인터뷰에서 SVB 사태의 시사점과 한은의 기준금리 기조, 올해 물가상승률 전망 등에 대해 언급했다.

이 총재는 주요 20개국(G20) 중앙은행 총재 회의,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그룹(WBG) 춘계회의 참석차 미국 워싱턴에 머물고 있다. 오는 15일에는 ‘중앙은행의 인플레이션 대응’을 주제로 한 IMF 고위급 패널토론에 참석할 예정이다.

미국보다 디지털화 진전된 한국, ‘폰 뱅크런에 취약

이 총재가 SVB 사태와 유사한 일이 한국에서 벌어질 경우 한국의 예금 인출 속도가 “미국보다 100배는 더 빨랐을 것”이라고 예측한 이유는 미국보다 한국의 디지털화가 훨씬 진전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총재는 “젊은 층의 디지털뱅킹이 한국에서 훨씬 더 많이 발달했고 예금 인출 속도도 빠른 만큼, 이런 디지털 시대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과거에는 은행이 문을 닫았을 때 수일 내 예금을 돌려줬지만, 이제는 수 시간 내 고객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며 “한국은행이 감독 당국과 함께 어떻게 대응할지가 새로운 숙제”라고 덧붙였다.

실제 SVB가 삽시간에 파산한 배경으로 스마트폰이 지목되고 있다. SVB의 부실이 처음 SNS를 통해 확산된 이후 약 36시간 만에 SVB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이 7일 발표한 ‘국내 은행 인터넷뱅킹 서비스 이용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입·출금 및 자금 이체 거래의 77.7%가 인터넷뱅킹 이용 거래였다. 모바일뱅킹을 포함한 인터넷뱅킹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보편화된 국내 상황을 고려하면 “미국보다 100배는 더 빠를 것”이라는 이 총재의 발언은 허언이 아닌 셈이다.

예금자 보호 한도상향 요구도

SVB 파산을 계기로 예금자 보호 한도를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예금자 보호 한도는 금융기관이 파산 등으로 고객이 예치한 자금을 돌려줄 수 없게 됐을 때 예금보험공사가 금융회사 대신 지급해주는 최대한도 금액이다. 현재 한도는 지난 2001년 1인당 5,000만원으로 결정된 이후 22년째 제자리로, 미국(25만 달러·약 3억3,000만원), 유럽연합(10만 달러·약 1억4,000만원), 일본(1,000만 엔·약 1억원) 등과 비교했을 때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금융당국도 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3월 SVB 사태가 불거지자 금융위원회와 예금보험공사는 예금자 보호 한도 개선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고, 이 총재도 지난 13일(현지시간) 워싱턴 D.C.에서 기자단과의 간담회에서 “디지털 시대에 맞는 규제와 예금자보호제도 마련 등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다만 단순히 예금보호 한도 상향만으론 SVB 사태와 같은 위기에 적절히 대응하기 어렵다는 것이 업계 지적이다. 국내 은행 관계자는 “미국의 예금보호 한도는 우리보다 6배 이상 높다. 이런 마당에 단순한 예금자보호제도 개선만으론 향후 있을 금융권 위기에 대한 대응이 어려울 것”이라며 “이번 SVB 사태는 결국 미국 재무부까지 나서야 했을 정도로 구조적인 문제로, 디지털 뱅크런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부터 파악하고 접근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3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에서 기자단의 간담회에 참석했다/사진=한국은행

금융시장 교란 부르는 가짜뉴스부터 막아야

이 총재는 이번 미국 방문에서 디지털 뱅크런에 대한 견해도 자세히 털어놨다. 그는 앞선 간담회에서 “우리나라는 (가짜뉴스로) 한두 개 은행에서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이 발생하면 사람들이 돈을 빼는 속도가 엄청나게 빠를 수 있다”며 “AI로 먼저 잡아서 이게 페이크뉴스인지 아닌지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런 페이크뉴스가 나오면 갑자기 결제수요가 커질 수도 있어 은행으로부터 받아놓는 담보 비율을 더 늘려야 하나 고민이 있다”며 “예전 같으면 은행이 어려운 상황에서 예금보험공사를 통해 며칠 사이 예금을 돌려줘도 문제가 없었는데 지금은 2~3일이 아니라 2~3시간 안에 돈을 다 인출해갈 것이기 때문에 한은이 얼마나 빨리 돈을 쏴주는지도 중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연준)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파월 의장이 SVB(실리콘밸리은행) 사태에 가장 놀란 것이 돈이 빠지는 스피드(속도)였다고 이야기했다”면서 “미국에 와서 각국 중앙은행 총재들을 만나니 절반 이상이 그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 총재는 한국의 금리와 물가 수준과 관련해선 대체로 앞선 금융통화위원회 기자간담회 때와 유사한 입장을 내비쳤다. 향후 통화정책 전환 논의에 관한 질문에도 이 총재는 시기상조라고 재차 강조하며 “올해 연말 물가수준이 3% 정도가 될 것이라고 보고 있지만, 하반기에 불확실성이 있는 상황”이며 “기준금리를 낮추려고 하면 (물가 하락에 대한) 훨씬 더 강한 증거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금리를 낮출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다”고 답했다.